동행, 금강 이백리 길
<2004년 07월 21일(수)>
1. 07월 21일(수) 오전 06시 30분, 온수역에 모였다.
<동행, 7월 21일 준비 걸음 >
1. 새벽 05시 05분 기상, 5시 47분 아내 차를 타고 온수역에 도착 2. 06시 30분 전철을 타고 온수역 출발, 07시 10분 강남고속버스 터미널 도착 3. 07시 20분 강남고속버스터미널 출발, 09시 10분 공주버스터미널 도착 4. 09시 40분 공주 무령왕릉 앞 도착, 10시 04분 도보 여행 출발 |
(1) 온수역 풍경 : 늘 김밥 싸주고 배웅 나오는 어머니의 마음
아침에 일찍 일어난다는 생각을 하면서 잠이 들었던 탓인지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무겁다. 서둘러 아침밥을 챙겨먹었다. 새벽 밥, 밥알이 입안에서 따로 노는 듯 밥맛을 느낄 수 없다. 아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온수역에 도착했다. 아내는 이제 막 운전을 하기 시작했다. 아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묘한 기분이다. 마음이 편안하면서, 아직도 운전 면허증을 따지 않고 버티고 있는 내 자신을 이해하는 아내가 고맙다.
같은 반 현규, 대식, 원기, 윤주가 이미 도착해 있다. 잠시 후 석희가 김밥을 손에 들고 짐을 메고 등장했다. 아침 일찍 일어난 탓에 아침 식사를 거른 아이들을 위해서 석희 어머니께서 김밥을 여러 개 준비해 주셨다. 늘 아이들의 식사문제부터 걱정하시는 어머님의 정성이 고맙다. 잠시 후 재혁이가 왔다. 어머니가 배웅을 나오셨다. 재혁이 어머님이 이곳 온수역까지 온 것은 3박 4일의 시간이지만 그 시간만큼 보지 못하는 안타까움이었을 것이다. 집 앞에서 손 흔들어주러 나왔던 마음이 자신도 모르게 이곳 전철역까지 따라오는 발걸음으로 변하였을 것이다. ‘‘보고 싶어하는 그 간절함’을 이 녀석들이 알기나 할까. 세상에서 어머니만큼 이 녀석들을 보고 싶어하고 매일 매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을 이 녀석들은 알기나 할까.’
아직 오지 않은 1학년 학생들을 기다리는 동안 재혁이가 음료수 한잔을 준다. 이른 새벽 마른 입에 스포츠 음료의 맛이 시원하다. 드문드문 아이들이 모여들었고, 7시 20분에 공주로 가는 시외버스 출발시간을 고려하여 6시 30분 강남고속 버스 터미널로 가는 전철을 탔다. 전철을 기다리느라 간이 의자에 앉아있는데 윤주가 매치니코프 한 병을 준다. 텁텁하지만 영양이 가득한 윤주의 마음이 다가온다. 조태진 선생님 반의 한녀석이 오지 않아 조 선생님이 남아 기다렸다가 함께 오기로 하고 버스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나머지 15명이 먼저 전철을 탔다. 우리반 석희, 원기, 현규, 윤주, 대식, 재혁 6명과 백태현, 조태진 선생님반의 9명과 함께 내가 먼저 강남고속버스터미널로 갔다.
7시 10분 강남고속 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미리 표를 예매하느라 먼저 와있던 권종현 선생님이 의자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늘 공부하고 생각하는 지적 성실성을 배우는 권선생님의 모습을 보니 무척 반갑다. 아직 오지 않은 1학년 한 학생은 조태진 선생님이 다음 버스로 함께 오기로 하고 우리일행은 공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2) 공주로 가는 버스 안 : 잠은 오지 않고 결핍의 교육만 생각나는.............
‘동행? 함께 움직이는 손과 발, 함께 걷는 교사와 학생들, 함께 가는 길은 무엇일까?’ 버스에 올라 자리를 잡았다. 이른 새벽 부족한 잠을 보충하려고 눈을 감았다. 잠자리를 바꾸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습관 탓인지 버스를 타도 잠이 오지 않는다. 좌석 머리받이에 기댄 머리가 흔들려 차창밖으로 지나치는 아침 풍경이 낯설다. 단풍잎 만한 창문으로 출근하는 거리의 풍경이 낯설다. 이미 멀리 떠나는 사람의 마음으로 바뀌었나 보다. 마음은 왜 이리 간교한지? 일상의 거리를 떠난지 몇분이나 지났다고 그 사이 그 거리가 낯선 도시로 변할까?
서울로 올라와 낯설음에 힘겨웠던 지난 시절이 떠오른다. 고등학교 1학년 윤리선생님이 소개해준 롱펠로우의 <인생예찬>이란 시집을 사러 집에서 가까운 서점을 향하였다. 문제는 집에서 서점을 가려면 육교를 넘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지금이야 육교가 철골구조에 튼튼하고 믿음직한 안전장치로 여겨지지만 그 당시 시골에서 갓 올라온 나에게 출렁출렁하는 육교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 곳을 넘으려고 육교 앞에 섰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물론 몇 차례의 시도 끝에 난간에 서있는 지지대를 붙잡고 육교를 올라갔다. 그 위에서 아래보다는 먼 곳을 바라보았다. 아니 밑으로는 눈길을 옮기지 못했고, 먼 곳만 바라볼 수 있었다. 먼 곳, 그곳에서 자동차들이 달려오고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육교는 출렁거렸다. 울렁울렁 속이 뒤집혔고 눈을 감았다. 처음 올라 서 본 육교 위, 그곳에서 바라 본 풍경은 아득했고 낯설었다. 차라리 슬펐다. 시골에서 늘 땅에 발붙이고 올려다보던 산과 강은 없었다. 회색빛 건물의 낯설음, 그곳에서 그렇게 울렁거리는 내 속만이 있었다.
공주로 향하는 버스가 도로공사를 하는 지점을 지날 때 덜컹거렸다. 옛날 고등학교 시절의 울렁거림이 다시 찾아오는 듯 했다. 고속도로에 접어드니 한결 기분이 나아진다. 탁트인 전망이 우선 맘에 들었다. 이른 시각이라 차는 그리 막히지 않는다. 주변을 둘러보니 잠들어 고개꺾인 아이들이 여럿이다. 나도 잠을 청한다. 잠은 오지 않는다.
‘동행’, 누구가 어느 누구와 함께 가는가, 어디로 함께 가는가, 왜 가는가?’ 이번 여름방학 사제 동행 <금강백리길 따라 걷기>를 준비하면서도 늘 고민이었다. 아이들과의 일상적인 만남은 부정적인 모티브에 의한 경우가 많았다. 출근하면서 교실에 들어서면 지각하는 아이들을 기다려야 했고, 머리가 너무 길어 짧게 깎는 것을 지도해야 했으며, 담배 문제로 불려온 아이들을 지도하는 일이 많았다. 싸운 아이들, 물건을 훔친 아이들과 만났다.
그 아이들을 만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러지 말라”고 훈계하고 나무라는 일이 전부였으며, 간곡한 부탁을 통해 호소하기도 하였다. 문제는 그런 상황이 싫었고, 교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이것 밖에 없으며, 이것 또한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교사로서 가장 힘든 경우는 아이들의 문제상황에 직면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내가 하는 말과 몸짓과 행동이 바로 그때의 상황에서는 너무 어색하고 공허한 울림으로 사라진다는 느낄 때이다. 무기력한 상황에 있는 아이를 보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 바로 그 만남속에서 더 이상 내 말과 생각이 필요 없다는 느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한낱 소리로 전락한 언어들, 그것을 견딜 수 없었다.
동행, 함께 걷는다. ‘머리를 가지고 이야기하지 말자. 지각문제를 이야기 할 수는 없다. 이제는 긍정적인 일을 함께 함으로써 만나자. 긍정적인 만남의 계기를 만들자’ 목적이라면 이것이었다. 긍정적 만남의 계기를 만나고 그 계기를 함께 겪어보고 그 안에서 도대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교사와 학생이 함께 한 조를 이루어 활동 할 거란다. 이미 경험했던 많은 교육활동에서 교사 한명에 의한 지휘통솔의 모습을 자주 보았다. 교사 한명과 아이들과는 분리되어 있었고 여러개의 조를 지도하려면 교사한명의 지배력이 그 교육활동의 성패를 가늠할 수 있었다. 문제는 교사 중심의 사제 동행이었다. 교사 중심의 교육활동은 주변부 아이들의 활동을 만드는 법이다.
이번 동행은 교사가 모임원으로 참여하는 활동이다. 담임 1명과 아이들 네 다섯명의 조를 꾸렸다. 김홍규 선생님을 비롯하여 조태진 권종현선생님의 개별적 경험의 축적이 있었고, 개별화된 다양한 경험을 엮어서 함께 공유할 수 있고, 결합할 수 있는 기회이다. 학급 앞뜰야영을 비롯하여 치악산, 설악산 체험활동, 하의도 섬 기행을 통해 교사들은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고 이제는 그 경험들을 모아 함께 동행하고자 하엿다. 담임이 조원으로 자연스럽게 참여하여 한 구성원으로 있으면서도 야외 생활의 다양한 노하우를 자연스럽게 전달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다. 주변부 아이들의 교육활동이 아니라 아이들 스스로가 구성원의 역할로서 자기주도적인 참여를 이끌어볼 욕심도 생각했다.
9시 10분 공주 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하였다. 늦게 온 아이 때문에 조태진 선생님은 그 아이와 함께 40분 늦게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미 김홍규 선생님은 렉스턴 차로 반 아이들과 함께 도착해 있었다. 여러 선생님들의 모습을 보니까 늦게 오는 조태진 선생님의 모습이나 반아이들과 함께 차를 몰고 온 김홍규 선생님이나 아이들과 자리를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백태현 선생님이나 모두 정겹다. 역시 아이들을 잘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관심을 나누고 감정을 나누고 눈길을 트고 더 나아가 마음길을 트는 일이 더 중요함을 실감한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잘 가르치는 지적 활동을 벌일 때 그 지식은 사람을 해치는 도구가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는 지식으로 자리잡지 않을까.
9시 40분 공주 버스터미널에서 무령왕릉 앞에 도착했다. 버스 터미널에서 김홍규선생님의 렉스턴으로 이동하는 조와 택시를 이용하여 그곳에 도착하는 무리가 하얗게 무리지어 차에서 내린다. 무열왕릉 건너편은 과수원이었다. 아이들에게 걸을 준비를 하라고 이야기하고 나도 반바지와 모자와 반팔과 수건 등 걸을 준비를 하였다.
2. 07월 21일(수) 오전 10시 04분, 너와 나는 등짐을 지고 걷기 시작했다.
<동행, 7월 21일 걸음마를 시작하다>
1.10시 04분 무령왕릉 앞을 출발하다. 2. 10시 11분 공주의 역사에 대해 김홍규 선생님 설명하다. 3. 11시 15분 모텔<하얀성>에서 문전박대 당하다. 4. 12시 00분 축산 농가의 할머니댁에서 정수기 물을 얻다. 5. 12시 20분 대길환경산업 식당에서 점심을 먹다. 6. 15시 10분 고속도로의 지하통로, 혹은 굴다리에서 휴식하다. 7. 17시 30분 송간초교에 도착하여 숙영을 준비하다. |
(1)공주 무령왕릉 앞 :
무령왕릉(武寧王陵)은 충남 공주시 금성동 송산 언덕에 위치해 있다. 이곳 송산 언덕은 백제가 공주에 도읍을 정하고 있던 시기의 왕들의 무덤이 밀집되어 있어 송산리 고분군이라 불리는 곳이다. 10여 기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현재까지 발굴된 것은 모두 일곱 기의 무덤으로 각각 1호분부터 7호분까지인데 이중 7호분이 유명한 무령왕릉이다.
무령왕릉은 백제 25대 왕인 무령왕과 왕비의 합장릉으로, 5호분과 6호분의 침수를 막기 위해 배수로 공사를 하던 중 우연히 발견되었다고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고분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이 무령왕릉은 발견 당시 사학자들을 들뜨게 한 의미 있는 무덤이라 한다. 우선 6호분과 함께 벽돌로 쌓아 만든 전축분이란 점이 눈길을 끌고, 다른 백제의 왕릉과는 달리 안에서 국보급 유물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유물은 모두 108종 2906점에 이르고 있으며 이중 국보로 지정된 것만도 12점이나 된다. 현재는 모두 국립공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으며 대표적인 것으로 왕과 왕비의 금관 및 금제 관장식, 금제 귀걸이, 금제 목걸이, 청동거울, 배개, 족침 등을 들 수 있다.
이 왕릉에는 삼국시대의 확실한 연대 및 그 시대의 사회상, 문화상 등 역사적인 사실들을 입증하는 108종 1,906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무령왕릉의 발굴은 우리에게 백제 문화의 찬란함을 확인하도록 해주었을 뿐 아니라, 한국 고분 발굴사에 한 획을 그었다.
무령왕릉은 우선 벽돌로 만든 지하 건축물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사용된 벽돌은 주로 연꽃을 소재로 한 무늬들로 표면을 장식하였기 때문에 전체적 외관이 퍽 화려하고 세련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왕과 왕비가 모셔진 바닥에서 천정까지의 높이는 3미터에 이르고, 입구와 현실의 천정은 아치형으로 축조하였다. 무령왕릉은 백제 시대의 건축수준, 예술적감각, 그리고 사상적 배경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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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 04분 단체 사진을 찍고 출발을 하였다. 얼핏 먹을 물을 물병에 담아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지만 출발 당시의 어수선한 풍경속에서 잊어버렸다. 나중에 물이 없어 무척 고생한다. 꼭 마음에 담아두어 챙겨야 할 것을 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여하튼 김홍규 선생님의 렉스턴 차에 무거운 짐을 싣고, 스스로가 책임지고 등에 질 수 있을 정도의 등짐만을 지고 출발하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가볍게 출발하는 걸음, 천리길도 한걸음씩 걸어가는 일, 이제 출발이다. 모든 일은 시작이 있으니, 그 시작이 비록 아주 미천하고 미약할지라도 이어지면 아주 큰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처마끝으로 떨어지는 빗물 한방울씩의 충격이 나중에는 바위를 쪼갤 수 있을 것이다. 한 걸음은 천걸음을 가기 위한 내어디딤이다.
잠시 걷다 보니 10시 11분 김홍규 선생님이 아이들을 잠시 모아 설명한다. 651번 국도를 따라 걷는다는 오늘의 일정을 소개하면서 공주역사와 문화재에 관한 설명을 한다. 늘 보아도 듬직한 김홍규 선생님이다. 아주 밝은 웃음소리, 청명한 가을하늘을 닮은 웃음소리에 일상의 힘듬에서 힘을 얻고 있는지 오래되었다. 김홍규 선생님의 밝은 웃음소리를 무료로 듣는 빚쟁이다. 나는 무엇으로 그 빚을 갚을까.
10시 40분 걸은지 채 40분도 되지 않아 왼쪽 발바닥의 한 부분이 아파온다. 이번 3일동안 꼬박 걸어가려면 무척 힘들겠구나 겁이 덜컥 난다. 이제 시작했는데 벌써 발바닥에 이상이 생기면 큰일이다. 일행과 떨어져서 잠시 주저 앉았다. 운동화끈을 풀고 양말을 다시 벗었다 신었다. 다시 걷는데 한결 편안해졌다.
“이번 도보여행에서 나는 맨끝을 걸어가기로 했다. 여행이나 산행에서 늘 앞장서 길라잡이 역할을 했는데 이제는 뒷끝을 마무리하고 책임져야 할 만큼 나이가 들었나 싶다. 한 무리의 동행이 이루어지려면 길라잡이도 필요하고 묵묵히 걷는 자들도 필요하고 뒷배경처럼 여백과 마무리를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도 필요하겠지. 그러면서 늘 살아있게 만드는 등에같은 존대들도 필요하겠지. 마치 운동화 속에 들어있어 걷기 불편하게 만드는 조그만 모래알처럼 늘 아프게 하면서 늘 깨어있게 만드는 역할말야. 그 모래알이 때로는 너무 아프게 만들어 지치게 하고 등돌리게 하지만 그래도 그 모래알이 있어 늘 아파할 수 있고 함부로 달리거나 걸어갈 수 없는 법이지”
언젠가 마라토너의 최대의 적은 옆에서 달리고 있는 경쟁자가 아니라 자기 운동화 속에 들어온 조그만 모래알 하나라고 했다. 그 모래알이 경기를 포기하게 만들 수도 있는 법.........
하지만 적당한 정도의 아픔은 늘 내가 걷고 있다는 각성을 알려주겠지. 지나치면 지치게 만들고 포기하게 만들 수도 있는데...........
11시 15분 첫 휴식을 할 시간이 30여분 지났다. 쉴만한 곳을 찾아 보았지만 없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햇살이 환한 곳뿐이다. 새로 생긴지 얼마 되지 않은 탓인지 국도 주변에는 가로수 한그루 심어져 있지 않고 허허벌판위거나 산등성이 비슷한 곳이다. 먼 곳에 쉴만한 곳이 하나 발견되었다. 이름하여 모텔 <하얀 성> 건물이 있으니 그늘이 있고, 그늘에 쉬면서 물좀 얻어 먹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걸음이 빨라진다. 모텔입구에 들어가 자초지종을 말하려 하니 주인 아주머니 야박하게 거절한다. 영업의 야박성이 인간성의 황페함으로 이어진 모습이다. " 아이들과 함께 도보여행을 하는 교사입니다. 잠시 쉬었다가 갔으면 합니다." "잠시 쉬었다 가세요" 하며 붙잡던 영등포 거리의 찬란한 영업은 지친 영혼의 쉼터같은 안락함과 끈끈함이라도 주지만 이곳 모텔 아주머니의 거절은 자본의 천민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오직 이해관계의 틀에서 영업에 방해를 주어서는 안된다 한다. 단순한 휴식과 물 한모금의 식수를 얻으려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거절과 야박한 상업성이다.
너무나 가난하여 사랑할 삼각의 벽면이라도 찾기 위해 방황하는 연인들의 모습을 그린 <제8요일>을 생각한다. 영원히 올 수 없는 영원한 평화와 안식의 날 제8요일 집을 나선 우리들은 달콤한 휴식과 안락한 의자를 원하지만 지금 이순간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집을 나선 자들은 벌거벗은 가난뱅이다. 일상의 편안과 안락함 그자체가 하나의 행복이다.
11시 25분 국도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건물하나가 있다. 우리들은 그곳으로 향했다. 어느 건설회사의 빈 사무실이다. 잠시 건물이 만들어준 그늘에서 누워서 휴식을 했다. 처음으로 운동화 끈을 풀고 양말을 벗어 발을 편안케 한다. 공주를 출발할 때 물을 준비하지 않은 실수 때문에 초래한 불편함이 크다. 한 10여분 쉬었다가 다시 출발이다.
11시 37분 도로에서 벗어난 둑방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빗물에 씻겨나간 흙 때문에 길바닥은 자갈이 많다. 자갈위를 밟으면 미끄러지기 쉽다. 조태진 선생님과 몇몇 아이들이 처지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온 것에 대한 후회와 어려움을 생각하고 곧 의미부여를 찾을 것이다. 사람은 의미를 추구하며 사는 존재이다. 의미부여가 얼마나 큰 가치부여를 하고 사람이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12시 00분 드디어 사람들이 사는 집 몇채가 보인다. 도로에 바짝 붙어 있는 민가다. 앞장서서 걷던 김홍규 선생님과 백태현 선생님이 아이들 두서넛을 데리고 가서 식수를 얻는다. 옆에는 소 몇 마리가 서있는 것으로 보아 축산 농가인 듯 하다. 축산농가의 할머니께서 정수기 물을 받아가라고 허락한다. 그래 아직 농가에는 인정이 살아있다. 땀 흘린 자들은 땀흘리는 사람을 보면 냉수 한 그릇 권하는 법이다. 손주녀석들 같은 아이들을 보면 정수기 통이 바닥이 날지라도 물을 받아가라고 한다. 모텔에서 경험했던 영업의 야박성 대신이 농가의 인정어린 손길이 눈물나도록 고맙다.
12시 20분 앞서 차를 몰고 점심먹을 곳을 찾아 갔던 권종현 선생님이 좋은 장소를 발견했다 한다. 좋은 장소 정도가 아니었다. 길 옆의 그늘이나 먼지나는 곳이 아니라 바로 식당에 들어가 우리가 준비한 도시락을 먹을 수 있으니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점심은 권종현 선생님이 공주시내 어느 식당에서 도시락을 주문하여 배달해 온 것이다. 식당을 빌려 먹는 이 행운.......그 식당은 대길 환경 산업(041.856.3001)에 딸린 부속건물이다. 대길 환경산업은 폐기물을 처리하는 업체이다. 충남 공주군 이인면 마수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놋점 2교와 놋점 3교라는 다리를 지나서 얼마가지 않으면 길 옆에 있다. 흠뻑 젖은 몸으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 먹는 밥맛....너무 맛있다. 꼭 조여맸던 운동화 끈을 풀고 그냥 눕고 싶다. 밥을 먹고 나오면서 몇몇은 등목을 하고, 나는 그 업체에서 일하고 있는 한 사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 고향이 공주 근처인지라 같은 고향이라는 사실, 축구를 매주 하는 사내의 발톱을 보았고, 밝게 웃는 사내의 웃음을 보았다.
13시 00분 다시 출발이다. 현규가 오전에 자꾸 처지길래 몇 번 가방을 밀어 올려주었다. 묵직하게 가방이 메마른 현규 등을 잡아당긴다. 앞으로 가려면 자꾸 가방이 뒤에서 잡아당기는 인상이었다. 점심먹고 출발할 때 현규 가방을 바꾸어 메었다. 맨뒤에 걷고 있는 현규와 동행이 되었다. 녀석은 자꾸 처지려고 한다. 녀석의 걸음에 맞추자니 일행과 너무 떨어지고 일행의 걸음을 쫓아가니 녀석의 걸음이 따라오지 못한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걷다가 녀석과 걸음걸음 맞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바로 그 상황에서 그 녀석과 함께 걷는 일뿐이었다. 그 시간 그 곳에서 그녀석과 함께 걸어가는 일, 동행이었다. 너와 내가 태어난 곳 다르고 태어난 시간 달랐지만 지금 이순간만큼은 같은 곳을 걸음맞추며 걷고 있다.
13시 57분 휴식하다. 도로둑을 타로 내려와 밭가 나무 숲 그늘에서 휴식이다. 밭에는 호박넝쿨이 뻗어있고, 콩 몇포기 있다. 아마 강가 잦은 빗물 씻김에 영양가 적은 밭이라 그런지 어째 시들하다. 숲그늘 모기가 달라붙는다. 그래도 쉴 수 있는 이만큼의 그늘이 고맙다. 그늘이 간절한 그리움으로 다가온 적은 별로 없었다. 한뙈기의 그늘 밑이 주는 시원함을 가진자 부자가 되었다.
14시 17분 다시 출발이다. 일어섰다. 앉았던 엉덩이에 흙이 묻어있다. 털 생각이 없나보다. 맨 뒤에 따라 걷다. 현규가 또 처진다. 신발에 문제가 있다.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걸어가니 얼마나 발바닥이 아프고 발굽마다 상처가 날까?
어릴 적 맞지 않는 옷을 입고 거리에 나서면 왜 그리 보는 눈이 많은 것처럼 느껴지던지.....마음이 무척 불편했던 기억, 현규도 지금 걸으면서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마음 불편하겠지.......네 불편을 내가 알 수 있음은 함께 걷고 있음이라.
14시 33분 잠시동안 생각할 수 여유가 찾아온다. 모두를 지친 걸음으로 걷고 여럿이 걷지만 혼자인 시간, 문득 내가 걸으면서 보았던 풍경을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오전부터 걸으면서 주변 풍경을 여유있게 감상한 적이 없다. 주변의 강과 산을 감상하면서 여유로운 동행을 즐긴 적이 없다. 걷기에 바빴다.
그렇다. 걷다보면 주변의 풍경보다는 자신의 내면이 많이 보인다. 내안의 모난 부분이 많이 보이고 이그러진 자화상이 보인다. 자기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 주변의 산과 강은 걷고 또 걸어가야 할 대상이다. 감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오직 힘들어 하는 자신과 마주서며 자기의 모난 부분이 자꾸 가슴을 찔러온다.
14시 43분 안으로 파고 들었다. 두고 온 사람들이 그립다. <그리움>......그들은 금강길을 따라 갔다. 둑방길을 걸었으며 강길 언덕에서 쉬었으며 다시 걸어갔다. 내가 그들의 뒷모습을 볼 수 있던 시간, 그래도 배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금강길을 따라 지평선 너머로 사사졌을 즈음 나는 자꾸 내 마음을 밟고 되돌아 오는 그들의 걸음소리를 듣고 있었다. 내 마음을 걸어 오는 그들의 모습이 자꾸 보였다.
그들은 이미 떠났다. 금강 둑방길을 따라 노을 너머로 잠자리 날아가듯 사라졌는데 나는 왜 자꾸 내 마음을 밟고 오는 그들의 걸음소리에 귀기울이고 있다. 내마음을 걸어오는 그들이 자꾸 보이길래 눈을 비비면 먼 지평선을 응시한다. 보일 듯 말 듯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저 흰 조각은 도대체 무엇일까?
14시 50분 드디어 현규가 차에 올랐다. 1학년 아이 중에 발꿈치가 까져 오전에 차에 올랐는데 현규가 드디어 올랐다. 그리고 일행이 많이 지쳐있다. 처지는 걸음이 많고 무리와 무리의 거리가 띄엄띄엄 흩어져서 걷는다. 15시 10분 다시 휴식을 취했다. 지하통로에서 휴식을 취했다. 아이들이 땅바닥에 드러눕기 시작한다. 조태진 선생님이 마을에 차를 몰고 가서 얼음 동동 띄운 보리차를 얻어왔다. 물공급이 원활치 못하다. 잠시 모여 의논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송간초교로 하고, 물공급과 간식준비를 권선생님이 맡았다.
15시 30분 다시 출발하여 걷는데 16시 15분 저석 3리 부여 보령과 천안을 갈라지는 갈림길에서 빵과 우유를 만났다. 지하통로나 수로로 사용할 굴다리를 시멘트로 만들어 놓은 것 속에서 휴식하면서 간식을 맛있게 먹었다.
16시 45분 출발하여 목적지인 송간초교에 도착하였다. 오늘 대략 27KM정도를 걸었다. 부랴부랴 씻고 별을 아주 잠시 잤다. 밤새 지나가는 자동차의 굉음과 소음 때문에 자주 잠이 깼다. 학교울타리 밖이 바로 길이였고 그 학교울타리 바로 안에 텐트를 쳤다.
<2004년 07월 22일(목)>
1. 07시 47분 송간초교를 출발하다. 2. 09시 25분 낙화암, 부소산성 주차장에서 부여의 역사와 유적지에 대해 설명하다. 3. 11시 03분 정성필 선생님과 아이들 2명이 함께 걷기 시작하다. 4. 12시 30분 남산초교 옆 민가 주차장에서 양푼이비빔밥을 먹다. 5. 15시 57분 목적지 세도초교에 도착하다. 6. 16시 20분 함께 모여 축구를 하다. 7. 18시 30분 저녁식사를 하고 반별 대화 및 오락시간을 갖다. |
1. 07월 22일(목) 오전 07시 47분 자, 다시 출발이다.
새벽 5시에 일어났다. 온 몸이 찌뿌듯하고 발바닥이 무척 아프다. 찻길 옆에 텐트를 치고 자는데 밤새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에 자주 잠을 깨었다. 휭하고 지나면서 자동차 바퀴와 도로면이 부딪치면서 내는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 잠을 깨기도 하였다. 송간초교는 화장실을 사용할 수 없어 산속에 들어가 아침 볼일을 보고 오니 5시 40분 정도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김홍규 선생님은 렉스턴 차에서 웅크리고 자고 있다. 아침밥과 찌개를 끓이려고 준비를 하였다. 현규와 윤주가 나랑 함께 텐트를 사용하고 재혁, 대식, 원기, 석희가 다른 텐트를 사용했다. 현규가 부스스 눈을 비비고 일어난다. 현규와 함께 맛있는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7시 47분 송간초교를 출발했다. 윤주가 준비한 오뎅 어묵을 넣고 끓인 찌개를 먹었다. 아이들은 재료를 다르게 넣었어도 찌개 맛은 3박 4일 동안 변하지 않았다고 평가한 그 찌개의 첫 작품이었다. 송간초교 정문을 나와 가게 앞에서 도로변을 걸어갈 때의 안전문제와 서로 함께 도와주며 걷자고 아이들에게 당부했다.
일렬로 늘어선 일행의 맨 끝에 서서 걷기 시작했다. 여름 아침 축축한 습기가 있고 햇살이 떠오르는 시각이다. 아침부터 매미가 운다. 내부의 공명을 이용한 저 쩌렁쩌렁한 울림을 들으니 무척 시원한 느낌이다. 금강을 끼고 이어진 둑방길을 따라 걷는다. 아침 안개가 자욱하다. 안개속에서 다만 매미가 숨죽인 간밤의 역설을 끝내고 울고 있다. 어제는 도로변의 땡볕 내리쬐는 길을 걸었는데 오늘은 강을 따라 이어진 둑방길을 걷는다.
반아이들의 모습을 본다. 어제 대식이가 마지막 송간초교 걷기 1시간 전에 탈진하여 차를 타고 갔고, 현규는 무릎이 아파 잠시 차를 이용했다 오늘 아침에 보니 원기가 발바닥 물집을 터뜨려 불편하게 걷고 있다. 석희와 재혁이 윤주는 아직까지 잘 걷는다.
8시 47분 부여초교에서 휴식을 가졌다. 화장실 문제가 가장 급했다. 어제 숙영을 한 송간초교는 실내에 있는 화장실을 사용할 수가 없어 꾹 참고 여기까지 온 사람들이 많았다. 걸어오는동안 안개가 자욱하고 안개비가 떨어지기고 했다. 안개속에서 힘든 생리적 현상의 고통, 차마 안개구경은 하지 못했다.
9시 5분 일행은 다시 출발했다. 걷던 일행은 9시 25분 낙화암과 부소산성이 앞에 있는 주차장에서 잠시 앉아 김홍규 선생님이 들려주는 부여의 역사와 유적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앉아 있는 아이들의 모습속에서 지친 기색이 보였다. 9시 50분 택시를 타고 장암방면 석동교로 이동하여 다시 도보를 시작하였다. 둘째 날의 특징은 둑방길을 따라 걷는 일정이었다. 강물줄기가 흘러가는 길 따라 만들어진 둑방위를 걸으면 마치 한 무리의 새떼가 줄지어 나는 듯한 풍경이었다. 길라잡이가 길을 틀면 줄지어 휘영청 휘어졌다가 다시 방향을 틀면 다시 줄지은 행렬이 되었다. 꼬리잡기 놀이를 하는 아이들처럼 이리저리 돌고 도는 듯했다. 둑방길을 따라 걸으며 주변 풍경을 관찰할 수 있었다. 강물은 논흙을 풀어 놓은 듯 약간 거뭇했고 물가에는 억새풀과 물푸레나무인 듯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둑방밑으로 만든 논밭이 몇 개 이어져 있고, 그곳에서 등굽은 사람들의 일생이 있었다.
왔던 길을 돌아보면 꼭 누군가가 따라오고 있을 것만 같았다. 앞에서는 꼭 누군가가 걸어오는 듯했다. 앞에서 달려오는 사람들은 내 마음을 밟고 다가왔으며, 뒤따라 오는 자들은 내 마음을 지나 훌쩍 지나가는 듯했다.
10시 35분 기나긴 둑방길을 걷다가 북고 2 배수장이 만들어준 그늘 밑에서 잠시 휴식을 하였다. 초콜렛과자가 햇볕에 녹아 뭉개졌지만 참으로 맛있다. 10시 50분 다시 출발이다. 11시 03분 정성필 선생님과 1학년 학생 2명이 결합했다. 지리산을 갔다가 어제부터 같이 동행할 계획이었는데 너무 힘들어 하루 늦게 도착했다. 아이들과 함께 하려는 정성필 선생님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찡하다. 가도가도 끝없는 둑방길, 왼편으로는 강물이 거대한 몸통을 뒤틀며 꾸물거리고 오른쪽으로는 논에 벼들이 풋풋하다. 사람들 몇은 밭에서 일을 하고 있다. 끝없이 이어진 둑방길을 걸으며 쉴 수 있는 그늘을 찾는다. 아무리 찾아도 나타나지 않는다. 11시 46분 둑방의 경사진 길옆에 서있는 (주)성주건설 현장사무실이 만들어준 그늘에서 휴식이다. 11시 55분 다시 출발이다.
첫날은 도로변을 걷는 힘든 여정이었다. 오늘 둘째 날은 둑방길을 따라 걷는 일정이다. 아니 지금 이순간의 도보는 둑방길을 걷는 일이 아니라 시간을 걷는 자들이 되었다. 그냥 그 시간을 밟고 걷는다. 마치 군대의 행군같다는 느낌이 강하다.
12시 30분 남산 초등학교 옆에 있는 삼거리 근처의 어느 민가 주차장에서 점심을 먹었다. 오늘 점심메뉴는 양푼이 비빔밥이다. 민가 옆에는 하황리 농기계 보관창고가 서있다. 개 몇 마리가 있다. 평소 같으면 앉는 일이 불편한 장소지만 지친 몸을 쉬기에는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다. 양푼이 비빔밥을 먹는데 백태현 선생님과 2학년 장재혁의 비빔밥에는 고추장이 들어있지 않았다. 고추장이 없는 비빔밥을 비벼먹는 일, 참으로 고역스런 일일텐데......
14시00분 한 숨을 자고 다시 출발이다. 그러고보니 오전중에 차량을 탑승한 사람이 없다. 어제는 4명의 차량탑승자가 있었는데 오늘은 없다. 아이들도 이제는 걷는 일이 익숙해지고 걷고 싶다는 의욕이 있나보다. 약간의 불편한 고비만 넘기면 그 일 자체를 있는 것 같다. 걸어야만 앞으로 갈 수 있다. 주저앉으면 일어설 때가 가장 힘들지만 한 번 일어서면 등짐을 지고 걸어도 쉽게 나아갈 수 있다. 한 번 차량을 이용했던 아이들, 다시 걷기 힘들었겠지만 그 힘든 시기를 넘고나니 아이들이 잘 걷는다.
14시 40분 길가 참나무가 만들어준 그늘을 따라 일렬로 줄 늘어서 앉았다. 우리가 찾던 그늘이다. 드디어 그 아래 앉아 약간의 시원한 바람을 느낄 수 있다. 아직 권종현 선생님과 1학년 처진 아이가 저 멀리 걸어오고 있다. 아이 걸음에 맞추어 걷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으련만 천천히 아이 걸음에 맞추어 걷고 있다. 버리고도 싶겠지...........
15시 15분 다시 출발, 15시 34분 황토흙이 쌓여있는 창고에서 물을 먹기 위해 휴식을 하였다. 창고안 그늘은 시원하다 못해 싸늘하다. 15시 45분 다시 출발하다. 15시 57분 세도 초등학교에 도착하였다. 차량으로 숙영지를 여러곳을 알아보았지만 거절당하고 이곳으로 정했다. 근처에 있는 여러 곳의 초등학교지만 이곳 학교만이 숙영을 허락해준다. 권종현 선생님과 내가 교무실로 교장선생님을 찾아가 말씀드리니 친절하게 화장실과 수돗물 등 편의시설의 위치와 이용방법을 안내해 준다. 학교도 참 이쁘게 가꾸어 놓았다.
잠시 쉬다가 16시 20분부터 17시 30분까지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편을 나누어 축구를 하였다. 2학년 학생과 교사팀과 1학년 팀이 나뉘어 경기를 했다. 걷느라 힘들었지만 축구를 하니 또 신나게 논다. 재혁이의 엉성하면서도 투지 넘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18시 30분 저녁식사를 하고 숙영을 하였다. 밤늦은 시각 조태진 선생님을 비롯한 백태현 권종현 선생님이 아이들과 게임을 마치고 2학년 텐트 앞에서 아이들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윤주가 가져온 군용 카레가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2일째 총 23KM 정도를 걸었다.
<2004년 07월 23일(금)>
1. 08:00 세도초교를 출발하다. 2. 09:10 임천농업지구 사거리에서 휴식하다. 3. 10:20 나당 송정말을 비정 3리 마을회관 앞에서 휴식하다. 4. 12:12 양화가든에 도착하여 점심먹다. 5. 14:40 김홍규 선생님 차 수로에 빠지다. 7. 15:45 갈대숲을 통과하여 수박 1통을 깨어 나누어 먹다. 8. 16:20 숙영장소 기다리며 신성 버스정류장에서 앉아 기다리다. 9. 17:06 화양초교에서 숙영하다. 10.21:30 전체가 씨름장 주위에 둘러앉아 도보여행의 소감 발표하다. |
08:00 세도초교를 출발하려고 짐을 정리하여 2학년 우리반 녀석들과 함께 1학년 아이들이 정리하여 나올때까지 기다렸다. 세도 초교의 교장 선생님은 수위같은 인상에 참 편안한 느낌을 주는 선생님이었다. 우리가 도착하여 교무실을 찾았을 때 흔쾌히 운동장에서 숙영을 허락해 주었으며 외부에서 사용할 화장실이 어디에 있는지 친절하게 그 위치까지 알려주었다. 첫날의 숙영지였던 송간초교는 실내 화장실은 문을 닫아 이용할 수 없었고 외부에는 화장실이 없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숙영을 할 때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할 것은 물의 사용 문제와 화장실 이용 문제이다. 어제 숙영 한 세도초교는 그런 면에서 어려움을 겪지 않았고, 학교도 아담하게 잘 가꾸어져 늘 소박하게 꿈꾸는 한가한 시골의 교사가 근무하는 곳을 떠올릴 수 있는 곳이었다.
조금 걷다 보니 아직 몸이 풀리지 않아 온 몸이 뻐근하고 특히 종아리 부위가 당기고 아파왔다. 08:15 세도초교를 출발하여 3일째 도보행진을 시작했다. 아이들이 지쳤는지 아침 식사를 하고 짐을 정리하여 출발하는 시간이 많이 늘어졌다. 어제보다 25분이나 지체되었다.
09:10 한 시간 정도를 국도길을 따라 걷다가 임천 농업지구 사거리에서 휴식을 하였다. 길옆 인도 위에 아이들도 눕고 나도 누웠다. 아직을 해가 떠오르지 않아 축축한 습기와 이슬 머금은 논 옆이 시원했다. 09:20 윤주가 화장실을 다녀온 후 다시 출발했다. 아침 안개속을 걸으며 앞쪽 누군가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고, 약간의 바람도 불어 땀이 송골송골 맺혔지만 그리 덥지는 않았다. 노래부르며 행렬을 갖추어 걷는 도보여행에서 처음으로 신나는 걸음인 듯 했다. 더위에 지치고 자신의 몸에 상처를 염려하면서 걷는 길을 잠시 잊고 신나게 노래 부르는 것은 땀흘리며 노동했던 사람들처럼 고단함을 잊기 위한 일인 듯했다.
도보여행이란 상당히 목표 지향적이며, 그 목표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시간을 밟으며 걷는 일이며, 걷는 동안 자신과의 대화를 끊임없이 시도하는 일이다. 금강이백리길 도보여행은 목표의 선명한 제시가 아쉬움으로 남지만 그래도 도착할 수 있는 어느 곳인가를 상정하고 걷는다는 일처럼 발걸음을 재촉하는 일도 드물다. 걷는 동안 무료 하다 싶을 정도의 침묵과 묵언, 그리고 이어지는 명상은 동행의 또다른 맛이다. 함께 걸으며 나누는 이야기의 즐거움도 있지만, 걷는 동안 혼자 생각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밟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고 자신의 자화상과 만나 이야기하는 고요함 만큼 좋은 것도 없다.
09:40 임포 갈대 숲길을 통과하였다. 둑방 양 옆, 그러니까 왼쪽으로는 논이 펼쳐져 있고 오른쪽으로는 하천이 흐른다. 우리 일행은 바로 둑방 양 옆의 갈대를 끼고 둑방위에까지 무성하게 자란 갈대 숲을 헤치며 걸었다. 반바지를 입은 탓에 억새풀에 베이고 딸기 가시에 긁혀 따끔거렸다. 살을 베이는 아픔과 긁히는 따가움을 느끼며 양말은 이슬에 젖고 운동화는 질퍽거렸다. 베이고 긁힌 곳에 물기가 닿으면 그 아린 아픔은 또 가난했던 중학시절의 등굣길을 떠오르게 했다.
한 벌뿐인 교복 바지가랑이가 젖어 풀물이 드는 날이 많아졌고, 여름 한철만 그 풀길을 헤치며 등교하면 바지는 헤어졌고 풀물은 바지 가득 날파리처럼 달라붙었다. 해마다 바지가랑이는 줄어들었고, 풀물든 교복바지를 다음해 꺼내 입을라치면 망설여졌던지...........
우리 사는 일은 풀숲을 헤치며 아침 등굣길을 걷는 일이다. 바지가랑이 젖고 풀물들고 마음에도 함께 걸었던 동무의 못난 부분이 더욱 미워지고, 친구의 등에 붙에 있던 가난을 보기 싫어 나 혼자 앞선 걷기도 하였다. 간혹 콧수염 시커멓게 변하고 입김 뜨거워지던 녀석들은 빠른 연애를 시작하여 공장으로 하나 둘씩 떠났다. 그 때 그 친구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면서 살고 있을까?
10:20분 남당 송정 마을 비정3리 마을 회관 앞에서 휴식을 하였다. 권종현 선생님이 차로 가져온 빵과 아이스크림과 아침햇살을 맛있게 먹었다. 10시 50분 다시 출발하여 걸었다. 옛날 국도로 펼쳐진 길이었다. 첫날은 새로난 국도라 나무 그늘 하나 찾을 수 없는 길이었고, 둘째 날은 둑방길을 따라 금강하천을 바라보며 걸었으며, 삼일째는 옛날 국도를 따라 걸었다. 풍경을 감상할 수 있어 좋았다.
11시 25분 암수 1리 근처의 나무그늘 밑에서 휴식을 가졌다. 1학년 학부모님이 가져온 물을 맛있게 먹었다. 11시 40분 29번국도에서 68번 국도로 이동을 하면서 출발하였다. 12시 12분 양화면 양수리에 있는 양화가든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었다. 3일째로 접어드니 조금 여유가 생겼다. 점심을 먹고 대나무통 술을 한잔하고 흥겨운 오락시간이 이어졌다. 1학년 한수가 아리랑을 부르고, 2학년 원기가 남행열차를 부르고, 조태진 선생님이 올챙이 한 마리를 불렀고, 백태현 선생님이 섹시한 포즈로 곰세마리를 불렀다. 식당에서 3일만에 거울을 볼 수 있었다. 거울속의 내 모습이 낯설었다. 너무 익숙했던 한 사내의 얼굴이 낯선 얼굴로 다가왔다. 그 사내가 미워지기도 하고 그리운 얼굴이기도 하다. 미움과 사랑은 낯설게 하기의 전형적인 특징인데, 낯설음 속에서 연민의 정이 느껴진다. 거무스름한 얼굴, 퀭한 눈, 땀에 절은 머리카락 그 모습속에서 오래 전 남춘천역에서 헤어졌던 한 친구를 생각했다.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내가 가야할 미래의 시간에 나는 또 어떤 모습으로 거울을 바라볼 수 있을까? ‘달리는 기차바퀴가 말을 하려나’라는 카페, 그 집에 놓여있던 종이위에 낙서를 남겼던 그 친구는 어디에서 무엇을 할까?
14시 다시 출발했다. 정말 뜨거운 날씨다. 아스팔트 바닥에서 뿜어 올라오는 후끈한 열기가 숨이 쉬기 조차 힘들 정도였다. 불가마 앞에서서 훅훅 불어오는 뜨거운 김을 쏘이는 듯 파김치처럼 절여지는 느낌이다. 한참을 걷다가 오이하나씩 먹고 큰 길로 나서는데 김홍규 선생님차가 수로로 향하여 빠지기 직전이었다. 윤주가 어지럽다고 하여 차를 타고 걸으라고 했는데 차가 빠졌으니 그냥 데리고 걸어갈 수 밖에 없다. 김홍규선생님과 권종현선생님에게 차량 뒷수습을 맡기고 학생들과 나머지 일행은 걸어갔다. 렉카차를 불러 끌어올릴 생각이었다.
14시 50분 민가 처마 밑 그늘에서 휴식을 하였다. 병아리떼 삼삼오오 모여 쫑알 거리듯 , 말없는 그들이 그늘밑에 모였다. 15시 05분 다시 출발, 한참을 걷는데 갈대숲이 강옆으로 몇마지기인지 알 수없을 만큼 펼쳐져 있다. 강의 폭도 제법 넓고 흙탕물이지만 그 깊이도 어마어마 할듯한 강둑에 한없이 솟아있는 갈대숲의 출렁거림은 거대한 물결의 출렁임이었다. 15시 45분 휴식을 취하며 수박을 한통 깨먹고 수박씨 멀리 날리기 시합을 하였다.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어린 시절 우리는 수박을 먹으면 으레 손에 한 움큼 수박씨를 모아 두었다가 동무들을 만나 수박씨 멀리 뱉어내기 시합을 하였다. 간혹 얼굴에 붙은 수박씨는 순이얼굴의 검은 점처럼 바보스럽게보였다. 오줌멀리싸기 시합도 했는데, 그때는 낄낄거리며 마냥 좋은 시절이었다.
16시 05분 다시 출발하면서 3일째의 숙영지를 알아보려고 논의하였다. 16시 20분 일단은 도착 숙영지를 정하기 위해 차로 김홍규 선생님이 연봉초교와 금성초교를 알아보았다. 그런데 둘다 폐교였고 문제는 식수와 물사용의 문제였다. 오랫동안 폐교상태로 있는지라 그 물을 먹을 수 있을지 걱정 되었다. 마지막으로 화양초교를 알아보기로 했다. 문제는 3-4시간을 더 걸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지칠대로 지친 일행과 함께 더 걷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숙영할 장소섭외가 이루어질때까지 일행은 신성 버스정류장에서 앉아 기다렸다. 17시 06분 다행히 버스가 오면 그 버스를 타고 화양초교까지 가기로 했고, 버스가 오지 않으면 지나가는 차를 얻어타고 가기로 했다. 조태진 선생님과 나는 버스정류장 근처의 마을에 올라가 트럭이라도 얻어 탈 생각으로 트럭주인을 찾아 보았다. 하지만 트럭주인은 없었다. 그러면서 버스가 예전에는 다녔는데 최근에는 다니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할 수 없이 지나가는 차를 얻어타기로 하였다. 김홍규 선생님차는 수로에 빠질 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40KM 이상을 달리지 못했고, 고장난 소리가 나서 아이들을 태울 수도 없었다.
18시 08분 다행히도 권종현 선생님이 버스정류장 근처의 구동에 있는 구동교회 목사님께 양해를 얻어 목사님의 봉고차로 우리 일행은 화양초교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봉고차로 2-3번을 다녔으며, 김홍규선생님차를 고쳐서 몇 녀석이 탔고, 정성필 선생님은 예쁜 아가씨의 차를 얻어타고 왔다.
21시 30분 텐트를 치고 저녁밥을 해먹고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하고 씻고 하다가 21시 30분 전체가 씨름장 주위에 모여 도보여행 마지막 전날밤의 축제를 열었다. 케익을 자르고 각조의 대표들이 모여 촛불을 껐고, 도보여행의 소감을 이야기하였다. 석희는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는 기분의 도보여행이라고, 원기는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라고, 현규는 목마를 때 물을 건네주는 손길하나에 감사할 수 있듯 아주 작은 것들에 감사할 수 있는 기회였다고 소감을 밝혔다. 나는 나자신에게 또 한번 속은 기분이었다. 여럿이 하면 힘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도보여행은 역시 여러명이 함께 걷지만 혼자 스스로 한걸음을 옮기는 수고로움이 아주 중요한 것임을 잊고 있었다. 동행이란 내 대신 누군가가 걸어주는 일이 아니라 걸음을 맞추는 일이었다. 빠르고 느린 걸음을 서로 맞추며, 더욱 느린 걸음에 보조를 맞추는 일이었다. 그렇게 밤은 저물어갔다.
3일째 우리들은 약 20KM를 걸었다.
<2004년 07월 24일(토)>
1. 07:00 아침 일찍 일어나다. 2. 09:30 김홍규 선생님 차를 타고 금강 하구언에 도착하다. 3. 09:40 금강하구언에 도착하여 잔디밭에서 축구를 하다. 4. 10:30 전세버스를 타고 장항역으로 이동하다. 5. 11:45 장항역 근처의 신포 우리만두에서 냉면을 먹다. 6. 12:20 장항역 앞에서 교가를 부르며 해단식하다. 7. 12:55 장항역에서 영등포행 기차를 타고 올라오다. 8. 17:05 영등포역에 도착하다. 9. 18:00 온수역으로 이동하여 선생님들 맥주 한잔하다. |
드디어 마지막날이다. 우리의 도착지는 금강하구언이다. 07:00 아침 일찍 일어나서 아침 식사를 챙겨먹고 뒷정리를 끝낸 후 일행은 금강하구언으로 이동하기로 하였다. 09:30 김홍규 선생님 차로 이동하니 10분 거리에 있다. 09:40 금강하구언에 도착하여 아이들은 잔디밭에서 축구를 하였다. 3일을 꼬박 걸었는데도 저렇게 축구를 할 수 있다니 살아 꿈틀거리는 물고기 같다. 나는 금강하구둑을 바라보면서 도보여행을 생각하였다.
금강 하구둑은 전북 장수군 소백산맥 서사면에서 발원하여 충북 남서부를 거쳐 충남, 전북의 도계를 이루면서 군산만(群山灣)으로 흘러드는 총길이 401㎞의 금강 하구를 막아 건설한 둑이다. 방조제의 총길이는 1,841m로 1990년에 완공했으며, 연간 3억 6천만 톤의 담수를 공급한다. 전북과 충남 일원에 농업용수와 공업용수를 공급하고, 금강 주변 지역의 홍수를 조절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토양과 모래가 흘러내려 강하구에 쌓이는 것을 막아 군산항의 기능을 유지시키면서 바닷물의 역류를 막아 농경지의 염해 피해를 막을 수 있게 되었다. 또 금강하구둑은 군산과 장항(長項)을 잇는 교통로로도 이용되어 관광지로서 큰 몫을 하고 있으며, 금강하구둑 주변은 철새도래지로 잘 알려져 있다. 군산만(群山灣)으로 흘러드는 총길이 401㎞의 금강 하구를 막아 건설한 둑이다. 방조제의 총길이는 1,841m로 1990년에 완공했으며, 연간 3억 6천만 톤의 담수를 공급한다. 전북과 충남 일원에 농업용수와 공업용수를 공급하고, 금강 주변 지역의 홍수를 조절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토양과 모래가 흘러내려 강하구에 쌓이는 것을 막아 군산항의 기능을 유지시키면서 바닷물의 역류를 막아 농경지의 염해 피해를 막을 수 있게 되었다. 또 금강하구둑은 군산과 장항(長項)을 잇는 교통로로도 이용되어 관광지로서 큰 몫을 하고 있으며, 금강하구둑 주변은 철새도래지로 잘 알려져 있다. 금강 하구둑을 바라보면서 나는 안도현의 금강하구에서 라는 시를 생각하였다.
<금강하구에서>
시도 사랑도 안 되는 날에는
친구야 금강 하구에 가보아라
강물이 어떻게 모여 꿈틀대며 흘러왔는지를
푸른 멍이 들도록
제 몸에다 채찍 휘둘러
얼마나 힘겨운 노동과 학습 끝에
스스로 깊어졌는지를
내 쓸쓸한 친구야
금강 하구둑 저녁에 알게 되리
이쪽도 저쪽도 없이
와와 하나로 부둥켜 안고
마침내 유장한 사내로 다시 태어나
서해 속으로 발목을 밀어넣는 강물은
반역이 사랑이 되고
힘이 되는 것을
한꺼번에 보여줄 테니까
장항제련소 굴뚝 아래까지 따라온 산줄기를
물결로 어루만져 돌려보내고
허리에 옷자락을 당겨 감으며
성큼 강물은 떠나가리라
시도 사랑도 안 되는 날에는
친구야 금강 하구에 가보아라
해는 저물어가도 끝없이
영차영차 뒤이어 와 기쁜 바다가 되는 강물을
하루내 갈대로 서서 바라보아도 좋으리
10:30 금강 하구둑 잔디밭에서 축구를 하다가 근처에 정차에 있던 전세버스를 얻어타고 장항역으로 갔다. 11: 45 우선 장항역 근처의 신포 우리 만두라는 가게에서 점심식사를 해결하였다. 냉면을 먹었는데 그 양이 얼마나 많던지 냉면 그릇 가득찼고, 대식가로 소문난 김홍규 선생님조차 남길 정도였으니 그 양의 많음을 알수 있다. 그 가게에서 권종현선생님이 도보여행중 사용했던 경비에 대한 결산보고를 하였다. 임시로 총무를 맡았고 살림살이를 얼마나 잘했던지 70,000원을 거두었던 내역에서 아이들에게 30,000원씩 돌려주었다.
12:20 점심을 먹은 일행은 장항역앞에서 교가를 부르면서 해단식을 하였다. 둥그런 원을 그려 김홍규 선생님의 사회로 해단식을 하는데 가슴 한 켠이 뭉클했다. 김홍규 선생님 차에 큰 짐을 맡기고 김홍규 선생님 반 아이들은 함께 그 차를 타고 올라갔다.
12:55 장항역을 출발하였다. 영등포를 향하여 기차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모두들 잠이들었다. 많이 지치고 힘든 상태에서 기차 의자가 주는 안락함은 우리를 잠으로 이끌었다. 한참 잠을 자고 일어났는데도 아직도 2시간을 더 가야했다. 기차창밖으로 펼쳐진 들녘이 한결 싱그럽게 보였다. 권종현 선생님과 자리를 같이했는데 늘 옆에 있으면 너무든든하다.
17:00드디어 영등포역에 도착, 아이들을 돌려보내고 온수역으로 선생님들은 모여 맥주 한잔을 하였다. 18:00 온수역 맥주집에서 먹었는데 금방 취기가 올랐다. 긴장이 풀린 이후에, 그리고 땀흘려 목적을 이룬 이후의 한잔은 너무 쉽게 취하게 만들었다
<다녀온 후의 정리>
여행은 단순한 풍경구경을 하는 일이 아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구경하는 일이 아니다. 사진 몇 장찍고 돌아와 여행지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으며 떠벌리는 것은 여행의 목적이 아니다. 여행은 여행과정에 겪은 경험을 얻는 일이며 여행지에서 사람을 만나 사람의 삶을 이해하는 일이다. 여행이 이미 소비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은 시대에 살고 있다. 여행지를 찾아다니며 풍경을 구경하는 시간을 소비하고 추억을 되팔며 자신을 자랑하는 자기를 파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도보 여행에서 우리는 자주 경험할 수 있다. 단순한 풍경의 구경이 아니라, 여행지와 여행지의 유적을 몇장의 사진으로 남기는 일이 아니라 여행과정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경험을 얻고, 사람을 만나 사람을 이해하는 일을 만날 수 있다.
이번 도보여행에서 목이 마를 때 물을 구할 수 있던 곳은 농업과 목축을 하던 민가의 할머니였다. 제조업을 하던 식당에서는 우리를 맞아주었고 점심을 먹을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주었고 감사의 표현으로 담배 한갑을 드렸다. 그리고 서비스업이던 모텔은 “손님을 유치하여 장사를 해야한다”는 명목으로 우리를 문전박대하였다. 아니 장사의 목적보다는 무엇인가 숨겨 놓을 것이 많고 비밀스런 곳임을 알리려는 영업전략인듯했다. 무엇이 그리 숨길 것이 많은 것일까. 1차산업(민가)는 우리에게 정수기 물통까지 비우며 우리를 반겼지만 2차산업(제조업)은 정당한 댓가의 지불을 바라는 눈치였고, 3차산업은 우리를 문전박대하였다. 땀흘려일하는 민가의 할머니는 땀흘리는 사람의 모습을 알았고, 제조업의 식당은 땀흘린 이후의 빈 시간에도 장사하려했으며, 모텔의 서비스정신은 우리에게 인간성의 비정함을 알려주었다. 1차산업의 인간성은 그나마 인간의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고, 2차산업은 댓가라는 거래의 엄격함을 요구하였고, 3차산업은 이기적 본성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었다.
도보여행은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하는 일이다. 물이 부족하고 잠자리가 불편하고, 함께 도와야만 생활할수 있는 상황을 스스로 선택하는 일이다. 그 자발적으로 선택한 가난과 불편에서 세상의 인격성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또 비인간화된 세상을 보고 배움으로써 그 반면의 인간성의 따뜻한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달을 수 있는 기회이다. 세상을 인격적으로 경험하고 마음 전체를 통해 느낄 수 있는 기회는 돈으로 살 수 없다.
포장길을 차를 타고 가는 일이 아니라 맨발로 맨흙을 걸어가는 일이다. 포장길을 걸으면 무릎이 아프고 발바닥이 아프다. 맨발로 걷는 흙길은 따뜻한 대지의 온기를 고스란히 온전하게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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