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정점(栗亭店)
1. 동림사 독서기
화순의 겨울 새벽, 쌀가루 같은 첫눈이 흩뿌린다. 손바닥 같은 나뭇잎이 계곡 얼음에 쩍쩍 달라붙는다. 대나무도 추운 듯 차갑게 움츠려 손을 벨 것처럼 날을 세웠다. 계곡에 머리를 감으니 머리마다 고드름이 매달린다. 스님 한분이 종을 울리자 동림사 동쪽 산 위로 해가 떠올랐다. 열 일곱의 나는 요순의 세상을 꿈꾸며 맹자를 읽고, 스무 한 살의 형은 태평성대의 세월을 꿈꾸며 상서를 읽었다.
2. 율정의 밤나무 주막집
율정의 밤나무 주막집, 문풍지 황소처럼 우는 저녁, 퉁퉁 부어오른 등불이 처마 끝에 매달려 흔들렸다. 마당 앞 밤나무는 북쪽 칼바람에 피붙이의 목을 자르듯 가지를 찢었다. 뒤꼍 대나무는 목구멍 복받치는 울분을 누르르라 제 잎을 잘라내며 서걱였다. 오랏줄에 묶인 유배의 몸을 따라 과천을 지나 금강까지 따라붙던 바람이 갈재를 넘지 못하고 머리 풀어 헤치고 떠도는 밤, 차가운 방바닥 냉골이 뼈 속까지 스며들고, 뼈마디마다 밤송이 하나씩 박혔다. 이 밤 지나면 나는 나주 영산강을 건너 누릿재와 성전 삼거리를 지나 강진으로, 형은 서쪽의 흑산도로 귀양 간다. 살아서 증오할 율정점이여!
등잔불 심지마저도 얼어붙은 새벽, 머리 풀고 산과 강을 떠돌던 마음들이 문틈으로 새어들어 냉수사발에 살얼음으로 내린다. 문고리처럼 동그란 중형의 얼굴이 피오줌 가득한 요강 바닥에 내려 내 가슴을 싹둑싹둑 작두질 한다. 윷놀이의 말처럼 함께 얹혀 떠난 길, 생살 깎은 윷짝처럼 아픈 생애, 상투 푼 머리 서로 묶어 이별을 거부하고 맑은 피로 뜻을 묶어도, 묶인 채 끌려가는 길. 방문 앞부터 길이 갈라졌다. 문을 열면 헤어져야 한다. 문고리 잡으니 형님 마음 내 손에 쩍쩍 달라붙는다. 살아서 증오할 율정점이여!
흩어지는 핏덩이처럼 진눈깨비 하늘 가득 흩뿌리고, 밤나무 가지에 앉은 까마귀 제 새끼 가슴을 쫍는다, 형님, 몸 조심하시고,..아우야, 살아있으면... 말이 혀에 감겨 목이 메인다. 강물 얼려 길을 만들고, 깊은 산 눈발로 넘으며 고향으로 치닫던 마음조차 묶여 길을 떠난다, 형과 나는 옥돌을 쪼개어 나누어 손에 쥐고 헤어진다. 끌려가는 형님 발에서 짚신 한 짝 벗겨진다. 나도 반대쪽 한 짝 벗어 놓는다.
3. 강진읍내의 골방
강진의 저녁, 읍내에 들어서자 가부좌를 틀고 앉았던 어둠이 악다구니를 쓰며 패악질한다.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나무껍질처럼 성긴 얼굴로 사립문을 부수고 담장을 무너뜨린다. 말 걸어주는 사람하나 없고 달빛마저 싹둑 잘라 달아난다. 낫처럼 구부러진 주막집 노파가 겨우 찬바람 가득한 골방 하나를 내주었다. 밤새 대숲에서 창을 깎는 소리가 들리고, 마을 입구의 돌무덤들이 일어나 논밭을 뒤덮는다. 나는 오랏줄로 문고리를 걸어 잠그고 피 묻은 옷을 벗어 창문을 가린다. 나는 유배의 몸이다.
오랏줄에 묶였던 팔목을 보니 분노가 불길처럼 타올라 굴뚝까지 내뿜는다. 다 식은 방골에 더운 피가 흐르고 뜨거운 열기가 돈다. 아궁이에서 시작한 더운 힘줄로 찬방을 엮는다. 나는 방의 윗목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화로처럼 뜨거웠던 꿈을 생각한다.
4. 보은산 우두봉
흙담집 오두막의 방, 사의재(四宜齋)에서 3년 동안 창문을 닫고 밤낮으로 혼자 지냈다. 주막집 노파가 가끔 햇빛 한줌과 바람 세 말과 물 한 사발을 주었다. 그러면서 네 가지를 마땅히 조심했다. 생각은 마땅히 맑게, 용모는 마땅히 엄숙하게, 언어는 마땅히 과묵하게, 동작은 마땅히 무겁고 더디게 하였다. 그해 가을 겨우 겨를을 얻어 보은산의 우두봉에 올랐다. 바람 따라 밀려오는 바닷물은 산 밑 절벽에서 부서지고, 강진 읍내에서 밥 짓는 연기는 산줄기 따라 갈려 있다. 띠를 이루며 사라지는 먼 먼 곳 너머, 중형이 계신 서쪽 흑산도의 우이섬을 바라본다. 바다와 산이 겹겹이 줄지어 얽혀 있고, 안개구름이 나타났다 사라지면 섬들도 꺼졌다 솟기를 반복한다. 어느 섬에 형님이 계실까? 보은산의 다른 이름은 우이산이고, 절정의 두 봉우리는 형제봉이라 한다. 형이 계신 곳과 내가 있는 두 곳, 모두 이름이 우이이고, 봉우리 또한 형제봉이라......바다를 사이에 둔 강진과 나주의 흑산도, 형이 계신 우이도가 강진의 뒷산에 있고, 형님이 계신 우이도에 강진의 우이산이 있다. 술빛처럼 짙은 안개비가 내린다. 보고 싶은 마음 달래며 서로 쪼개 나눈 옥돌 신표를 손에 꼭 쥔다. 뾰족한 돌 끝 손바닥을 찢고, 부모가 물려주지 않은 손금 한 줄이 그어진다. 형님 생각 더욱 간절하다.
5. 내 편지와 형님의 답장
형님! 벌써 8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봄에 매화의 꽃망울이 터지는 사연과 여름에 초벌김 매며 낮술을 먹는 사연이 같은 이치이고, 가을에 절의 풍경소리에 낙엽이 떨어지는 사연과 겨울에 새벽까지 추녀 밑에 고드름으로 사는 일이 같은 이치입니다. 마음에도 사계절이 있고, 부모가 있고, 형님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보이는 것, 손에 닿는 것, 입으로 읊는 것, 마음속으로 사색하는 것, 붓과 먹으로 기록하는 것, 밥 먹거나 변소에 가거나 손가락을 비비고 배를 문지르는 것, 모두 당연한 이치가 있으며 다 그만한 마땅한 이유가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 자연의 이치에 따라 살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저 또한 자연의 이치에 따라 5년 동안 다섯 차례의 수정과 증보를 거쳐 <주역 심경>을 만들어 형님께 보냅니다. 원고 교정을 부탁드립니다. 하늘이 만약 저에게 세월을 허락한다면 이 책을 꼭 탈고하고 싶습니다.
아우야! 파도가 찰싹거리는 바닷가에 하루 종일 쪼그리고 앉아 바다 속을 들여다본단다. 바다는 사람의 마음 같아 그 속을 보면 네가 사는 강진의 산에서 이곳까지 흘러온 네 마음이 있단다. 낮은 이곳으로 흘러들면서 바위를 깨치고, 막으면 에돌아 흐르고, 길이 없으면 물길을 만들어 이곳에 온 너를 만난단다. 네가 물이 되어 내게 도착하는 것도 다 그만한 사연과 인연이 있기 때문이란다. 전복 다섯 마리와 홍어 한 마리를 보낸다. 마음을 크게 먹고 세월을 기다려보면 만날 날도 있을 거란다. 바다 속에서 도미가 해파리를 빨아먹는 모습이 꼭 네가 두부를 베어 먹는 모습 같구나.
6. 다시 율정 주막집을 지나며
18년 전 형님과 헤어진 율정점 밤나무 주막집의 가을, 이제 고향집으로 가기위해 다시 들른다. 쑥대가 허리 꺾어 절을 하고 배나무에 머리만한 돌멩이가 가득 열렸다. 지나는 사람마다 가지를 꺾어 줄기만 앙상하고 밤송이가 입을 벌려 통곡한다. 마당에 피운 모닥불에서 나뭇잎 타는 냄새가 맵다. 형님은 16년 동안 홍어를 잡아 나를 기다렸다. 3년 전 병으로 돌아가셨다. 죽음으로 이곳을 지나 선산으로 향하던 형님. 발에 돌을 얹은 듯 떨어지지 않는다. 살아서는 증오할 율정점이여!
방에 들어서니 물고기 그림과 설명을 적은 한지로 벽지를 발랐다. 제법 솜씨가 좋다. 말미잘은 둥글고 길쭉하며 검푸르다. 붙어있는 돌 모양에 따라 그 모양을 달리한다. 손가락으로 슬며시 가운데를 찔러보니, 손가락을 잡으려고 살짝 오므라들었다가 손을 빼니 물을 찍 쏜다. 오랫동안 이질을 앓은 사람의 빠진 항문처럼 생겼다. 문어는 둥근 머리 밑에서 어깨뼈처럼 여덟 개의 긴 다리가 있다. 다리 각 다리의 밑에는 국화꽃 모양의 둥근 꽃무늬가 두 줄로 늘어서 있다. 이것으로 물체에 한번 달라붙으면 끊어져도 놓지 않는다. 문어발처럼 흑산도로 달라붙던 내 마음, 요령을 울리며 떠나는 형님의 상여에 달라붙는다. 나는 18년 동안 지은 책을 메고 형님의 묘소로 아침 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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