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안길과 빈틈>
내가 앞서 걸었던 길이 뒤따라가는 길이다. 내가 지금 걷고 있는 길 또한 뒤안길이 될 것이다. 나는 늘 뒤안길을 걸어간다. 이제 나는 뒤안길을 사랑할 수 있다. 뒤꼍에 가면 감 홍시가 떨어져 있었다. 가즈런한 돌 위에 놓인 항아리가 참 예쁜 장독대를 볼 수 있었다. 고추장 독이며, 간장 독, 장아찌 박아둔 된장 독......... 장독대의 한 곁에 꿀 항아리가 숨어 있었다. 어머니가 돈 사러 장에 가는 날 몰래 퍼 먹던 그 꿀맛을 잊을 수가 없다.
앞마당에는 일하는 사람들의 땀이 있고, 멍석위에서 고추가 붉게 마르고 있다. 일하는 사람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고 도리깨질하는 어깨 근육이 꿈틀거리고, 콩깍지가 바짝 마른 옷을 털어내고 있다. 나는 앞마당보다는 뒤꼍을 좋아한다. 뒤안길을 걸어가면 앞마당에서 볼 수 없었던 계절을 만나고, 바짝 마른 햇볕을 만날 수 있다. 뒤안길을 가면 딸기가 열리고, 도라지꽃이 핀 언덕을 볼 수 있다. 콩을 터는 도리깨질 소리가 먼 곳의 소리가 들린다. 여름 그늘 속에서 고양이 실눈을 뜨고 졸 수 있어 좋다. 나는 앞마당보다 뒤꼍을 좋아한다.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시원한 소나기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연분홍 연서를 몰래 읽을 수 있어 좋다. 떠난 계집애의 얼굴이 하늘 가득 펼쳐진 하늘을 보고, 배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그리움을 만날 수 있어 좋다. 시큼한 살구 하나 먹고 눈 찡그릴 수 있어 좋다.
내가 가득 채우려 했던 항아리를 하나도 채우지 못했다. 항아리 가득 찼던 물은 빈 우주 공간을 만드는 용기일 뿐이었다. 채움은 더 큰 빈틈만을 만들 뿐이다. 나는 빈틈을 가진 사람이 좋다. 빈틈이 있어야 내가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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