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時節因緣)의 소리 2
내 얘기 잠깐 들어봐
모두가 고개 돌려 눈을 동그랗게 뜬다.
빈 틈 빈 항아리, 햇살마저 졸고 있는 뒤란에
잠시 쪼그리고 앉았다 일어서는 게
우리 사는 거잖아
아이들은 소풍을 다닐 테고
어른들은 술집을 다닐 테고
소풍가서 왁자지껄 떠들고
술집에서 소란소란 떠들고
우리 사는 거 너무 마음에 담지마
담아 둘수록 무거워 걷지를 못해
마음은 항아리와 같잖아
비울수록 가벼워지거든
비울수록 채워지거든
채워지면 자꾸 비워야 해
아니, 잠깐 내 얘기 들어보라니깐
모두가 고개 들고 귀를 쫑긋 세운다.
빈 밭 빈 논, 바람마저 얼어붙은 들판에
하루 서서 소리 듣다 사라지는 게
우리 사는 거잖아
아이들은 얼음장 위에서 썰매를 탈 것이고
어른들은 모닥불 주위를 에워 쌀 것이고
얼음장에서 손발이 얼고
모닥불보다 더 따뜻한 온돌을 기다리고
우리 사는 거 너무 마음에 두지마
담아 둘수록 붙드는 것이 많아 떠나지 못해
마음은 거울과 같잖아
비출수록 거짓은 사라지잖아
비출수록 남는 게 드물어
비추어진 것들은 자꾸 버려야 해
이제 내 얘기는 됐어
그 대신 이 소리를 들어봐
아무도 걷지 않은 새벽길을 걷는 발소리, 밭을 가는 황소의 울음소리, 잠든 겨울 산을 날아오르는 멧새의 날개소리,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나기소리, 건넌 방 윗목에서 술이 익어가는 소리, 문풍지를 훑고 지나는 바람소리,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냇물소리, 소의 귀밑에서 나는 워낭소리, 낙타의 턱밑에 늘여 단 방울소리, 풀이 누웠다 일어서는 소리, 끝끝내 넘어지지 않으려 버티는 논벼가 서로 등 부비는 소리, 허리 꺾여 아파하는 갈대의 서걱이는 소리, 빈 밭 빈 논에서 머리 풀어헤치고 달리는 바람소리, 바닷가 돌담 집 울타리로 서서 꽃망울 터뜨리는 동백꽃 소리, 민들레 홑씨 되어 나는 소리, 닭이 홰치는 새벽소리, 교회지붕에서 비둘기 날아오르는 새벽종소리, 산사의 처마 밑에서 흔들리는 풍경소리, 고구마 먹고 떠먹는 동치미 국물 목에 넘어가는 소리, 술 취한 아버지 돌아올 때 화롯불에서 끓는 된장소리, 베개 베고 두런두런 고모와 나눈 이야기 소리 .............
저 소리도 한 번 들어봐
자갈밭에서 여름 한 낮 돌이 오줌 누는 소리, 대나무 그림자 빈 집 마당을 쓰는 소리, 뒤 곁 처마 밑으로 빗방울 떨어질 때 풀뿌리 드러나는 소리, 뒤집어 놓은 빈 항아리 속에 머물다 가는 바람 소리, 겨울 산 밑 초가집에서 저녁 밥 짓는 연기소리, 책꽂이 오래된 책 위에 먼지 쌓이는 소리, 솔숲에 머물다 가는 달의 숨소리, 비바람에 뺨맞는 사과의 볼 소리, 새의 부리에 찍혀 속으로 아파하며 향을 만드는 모과소리, 자신을 찍는 도끼날에 향을 발라주며 쓰다듬는 향나무 손길 소리, 밤하늘의 별이 총총 모여 우는 소리, 비온 마당을 잰 걸음으로 종종 걷는 고양이의 발소리, 장마당 서면 가마솥에서 김나는 국수소리, 우물에 빠진 달을 퍼 올리는 소리, 막다른 골목에 선 낙엽이 구르는 소리, 이웃집 담 넘어 뻗은 가지에서 떨어지는 감꽃 소리, 빈 항아리 어둠 속 홍시의 어는 소리, 매화가지 끝에 매달려 떨어지는 눈 소리, 석양이 넘어가며 만드는 노을의 슬픈 소리, 저녁 땅거미 내려앉는 어둠의 소리, 눈길과 눈길이 마주쳐 마음의 길이 열리는 소리..........
그래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말없이 걷는 소리 같아.
시절인연으로 남은 소리를 들으며 눈밭에 묵죽을 치며 걷는 소리 말이야.
그래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침묵인 것 같아.
시절인연의 사연 속에 담긴 사랑을 감춘 달의 침묵 같아.
그래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고요인 것 같아.
시절인연으로 남을 소리도 없이 함박눈처럼 소복하게 쌓이는 정적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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