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게서 보았다. 외롭고 쓸쓸하지만 높은 또 하나의 삶을
어느 날 나는 네게서 눈처럼 쉽게 녹을 영광을 보았다. 나는 걱정했다.
어느 날 나는 네게서 품삯도 되지 않는 한숨을 보았다. 나는 걱정했다.
어느 날 나는 네게서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욕심을 보았다. 나는 걱정했다.
오랫동안 과거의 영광에 매여서는 안된다고
현재의 한숨에 기죽어서는 안된다고
미래의 욕심에 노력을 게을리하면 안된다고 걱정했다.
어느 날 나는 네게서 넘어진 자리만 짚으면 일어설 좌절을 보았다.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어느 날 나는 네게서 넘어져 깨진 상처를 보았다.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어느 날 나는 네게서 스스로 헤쳐 나갈 무거운 어깨를 보았다.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좌절은 일어설 수 있는 기회라고
상처는 아물면 더 단단해 진다고
무게는 마음으로 보면 가벼워진다고
너는 충분히 일어서 단단하게 어깨 활짝 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어느 날 나는 네가 넘어져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나도 울었다.
어느 날 나는 네가 혼자 주저앉아 아파하는 고독을 보았다. 나도 외로웠다.
어느 날 나는 네가 분노하며 세상을 향해 주먹질을 날리는 모습을 보았다. 나도 분노했다.
함께 소리 없이 울고
함께 외로워하며
함께 세상을 향해 분노하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어느 날 나는 네가 방향 없이 흔들리는 방황을 보았다. 나도 흔들렸다.
어느 날 나는 네가 파르르 나침반의 바늘처럼 떠는 두려움을 보았다. 나도 두려웠다.
어느 날 나는 네가 한없이 작아지며 고개 떨구는 모습을 보았다. 나도 고개를 숙였다.
너처럼 흔들리며
두려워하며
고개 숙이며
내 안을 보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어느 날 나는 시행착오 속에서 지혜를 발견하는 너를 보았다. 나는 믿었다.
어느 날 나는 교만 속에서 자기를 반성하는 너를 보았다. 나는 반성했다.
어느 날 나는 자랑 속에서 혼자가 되는 너를 보았다. 나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시행착오를 겪으며 다시 나아가고
교만하면서 겸손을 배우고
자랑하면서 혼자가 되고
그러면서 마음의 눈을 뜨고
마음을 넓히는 것 혹은 마음을 깊게 만드는 것이 사는 거니까.......
어느 날 나는 네가 네 안의 불안과 초조와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듬직했다.
어느 날 나는 네가 스스로 자기를 존중하고 아끼는 자존감을 보았다. 나는 행복했다.
어느 날 나는 네가 삶의 설계도를 그리며 건축하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담담했다.
자기를 이기며
자기를 아끼며
스스로 만들며
그러면서 완성해 나가는 것이 사는 거니까..........
이제 네가 세상의 한 구석에서 불을 밝히며 꿋꿋하게 살아가라고
이제 네가 아프고 슬픈 사람들의 등짐을 네 어깨에 짊어질 수 있으라고
이제 네가 네 삶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믿음 하나 선물할 뿐이다.
네게 세상은 네가 보여주지 않은 희망을 숨겨서는 안 되는 곳이라고
네게 세상은 너를 간절하게 원하고 필요로 하는 곳이라고
그래서 네게 세상은 네가 있는 한 살아갈 만한 곳이라고
나는 고백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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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람아 ! 네게 우선 최두석의 <거북이>란 시와 랄프 왈도 에머슨의 <무엇이 성공인가>를 선물한단다. 수능을 앞둔 네가 이제 용기를 발휘해야 할 시간이란다. 판도라의 상자 마지막에 남았던 희망을 붙들고 너를 믿을 시간이란다. 용기를 내고 희망을 믿거라.
갯바위 위에 웅크린 거북이 한 마리
부서지는 파도 맞으며 뒤설레는 밤바다 응시하고 있다
운명의 행로처럼 등껍데기에 펼쳐진
세상과 세월의 지도 위로 별빛이 빛난다
애초부터 잔재주의 토끼와 경주할 생각은 없었다
묵묵히 생애를 걸고 제 길을 갈 뿐인 것이다. ........ 최두석의 거북이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이에게 존경을 받고
아이들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
정직한 비평가의 찬사를 듣고
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
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며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
건강한 아이를 낳든
한 뙈기의 정원을 가꾸든
사회 환경을 개선하든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 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랄프 왈도 에머슨의 <무엇이 성공인가>
저물 무렵 지는 해를 바라보며 하람이 너를 생각한단다. 세상을 향해 첫 도전을 하는 네 앞에 <세상>이란 모래벌판이 펼쳐져 있단다. <세상이란 모래벌판>에 오아시스가 숨어있다고 함부로 말하고 싶지는 않단다. 그저 세상이 <오아시스를 가슴에 담은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은 알려주고 싶단다. 또한 모래벌판 너머의 무지개 숲속을 한 걸음으로 도달할 수 있다고 단정지어 말하고 싶지는 않단다. 그저 네 앞에 펼쳐진 <모래벌판 같은 세상>은 무척 목말라하고 있으며, 그 <모래벌판을 걸어가며 풀 한포기 심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은 알려주고 싶단다. 모래벌판을 걷는 일은 누구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네 자신부터 목마르고 넘어지는 길이란다. 그러므로 너는 낙타가 거대한 육봉을 만들어 자신의 영양분을 저장하고 사막으로 향하듯, 너의 목마름을 스스로 해결할 희망의 물통 하나쯤은 네 가슴과 허리에 차고 길을 가야 한단다. 그러면서 세상이란 모래벌판을 걸어가는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목마름도 느껴야 한단다. 너는 그 누군가의 목마름을 채워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단다.
네 자신의 목마름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은 네 스스로가 그 길을 걸으면서 풀을 심어 물길을 끌어오는 방법뿐이란다. 그러면 훗날 네 뒤를 따라 모래벌판을 걸어갈 또 다른 사람들의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단다. 네 스스로 모래벌판을 풀이 자라는 초원으로 바꾸기 위해 "씨앗을 심는 일”이 세상을 사는 방법이란다. 네가 뿌린 씨앗이 자라 풀이 되고, 그 풀들이 물길을 끌어올 것이며 물길이 트이면 그 길은 사람이 갈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란다. 네가 걸어가면서 뿌린 씨앗 하나만 싹이 자라더라도 모래벌판은 걸어갈 만한 추억의 길이 될 것이란다. 이미 너는 지금까지의 삶을 통해 <스스로의 목마름을 채울 물 한통>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배웠단다. 또한 그 누군가의 목마름을 채워야 삶이 행복함을 배웠단다. 모래사막을 횡단하고 나면 기념비를 세울 일이 아니라 우물을 하나 파둘 일이란다. 기념비석은 비바람에 흙가루로 변하지만 우물은 사막을 횡단하는 누군가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단다.
하람아! 내 어린 시절 산비탈 밀밭을 내려오면 조그만 도랑이 흐르고, 그 건너편에 고욤나무 한 그루 서있었단다. 새벽 서리 찬 기운에 계집애의 젖꼭지를 닮은 고욤들이 소낙비처럼 쏟아 내렸단다. 고욤을 종그락에 주워 담고 남으면 앞자락 말아 올려 주워 담았단다. 해 저물 무렵 집에 가져오면 고욤들은 엉겨 붙은 팥죽처럼 뭉개졌단다. 몇 달 동안 그 고욤을 무처럼 길쭉한 항아리에 재우면 고욤은 떫은맛을 떨치고 맛있게 익었단다. 그런데 고욤은 씨앗을 골라내는 재미가 더욱 쏠쏠하단다. 입 안 가득 고욤을 털어 넣고 오물오물 씨앗을 골라내기 바쁘게, 또 한 입 가득 고욤을 털어 넣으면서 먹었단다. 그 씨앗을 발라내는 재미는 외할머니 담뱃재가 묻은 왕사탕을 먹는 것처럼 기뻤단다. 씨앗을 골라낸 뒤끝의 텁텁하면서도 단 맛! 알밤의 고소하면서도 깔끔한 맛과는 달리 오랜 여운이 남는 맛이었단다. 그 고욤나무는 감나무로 변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단다. 그 고욤나무를 잘라내어 여린 감나무줄기와 영양통로를 맞추어 접을 붙인단다. 이것을 접목(椄木)이라 한단다. 고욤나무를 잘라 감나무를 접목하면 커다란 감이 주렁주렁 열리는 감나무로 변한단다. 고욤나무를 잘라내어 감나무의 여린 가지를 접목하여 감나무를 만들어내듯, 삶은 잘라내고 새로운 접목을 늘 시도하는 일이란다. 영광의 뒤안길에는 잘라낸 아픔이 있고, 고운 무늬의 뒷면에는 이처럼 달라붙은 바늘땀이 있듯, 삶은 그 뒤 곁에 늘 꼼꼼하게 기운 추억의 바느질을 숨겨놓으며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란다. 감 속의 씨앗이 몇 개인지 셀 수 있어도 씨앗에서 감나무가 자라 몇 개의 감이 열릴지는 아무도 모른단다.
하루살이의 일생은 하루라고 생각하기 쉽단다. 그에게 허락된 삶의 시간은 일몰과 함께 노을 속으로 사라지는 시간까지라고 생각하기 쉽단다. 하지만 그렇지 않단다. 하루살이는 십년 가까운 삶의 시간을 지니고 있단다. 하루 동안의 날개 짓을 위해 하루살이는 알에서 애벌레로, 성충으로, 나방으로, 그리하여 하루살이로 나는 시간을 지니는 것이란다. 삶의 시간은 그 전체의 과정이고 그 전체의 흐름 속에 있단다. 바다가 골짜기 물줄기에서 시작하여 이루어지는 이치와 같단다. 가는 물줄기가 흘러 흘러 거대한 바다를 만드는 것이란다. 사람도 마찬가지란다. 사람도 순간순간을 살아가며, 순간순간을 모아 삶의 역사를 이루어간단다. 이미 내 앞선 사람들의 삶이 있고 내가 살아가는 시간이 허락되었고 내 이후의 삶이 찾아올 것이란다. 삶에는 세상에서 눈에 띄는 시간보다 그저 묵묵히 준비하며 기다리는 시간이 더 많단다. 사람은 구체적인 사건과 일을 겪는 사람의 아들이란다. 사람은 바로 지금 이곳의 삶인 사회 속에 살고 있으며, 그때 그 순간 거기에서 살았던 역사 속에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단다. 사람은 시대의 아들이자 사회의 아들이란다. 그 시대와 그 사회 속에서 만나는 사람과 하고 있는 일에 마음을 다하여 살아가는 일이란다. 나무를 벨 수 있는 8시간이 시간이 주어진다면 6시간 동안은 도끼를 가는 데 사용하고 나머지 2시간은 나무를 베는 것이란다.
하람아! 네게 찬란의 장밋빛 인생 이야기를 하지는 않겠다. 네게 빛바랜 회색빛 삶을 이야기 하지도 않겠다. 다만 "지금 바로 여기에서 살고 있는 네 자신"이 바로 삶의 주인이란 점만은 말하고 싶단다. 네가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 사람인가 꼭 가슴에 담고 살아가거라. 너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그 누군가의 희망이며, 그 누군가에게 꿈을 주고 용기를 줄 수 있는 사람이란다. 네가 세상에 존재하고 있으므로 세상은 아름다울 수 있으며 보다 나은 세상이 될 수 있단다. 네가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단 한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하고 아름다워 질 수 있단다. 하람아! 네가 힘들고 지친 날 책상에 엎드려 누운 날에도 네 등 뒤에 아침햇살이 떠오르고 있었단다. 네 가슴과 허리에 꿰어 찬 아침햇살 한 통이 없어 스스로 고민하고 아파했던 날이 어찌 하루 이틀이었을까를 늘 가슴에 담고 살거라. 다만 네가 그 햇살을 울컥 삼켜버려 데인 가슴을 안고 뜨거워 뜨거워 펄쩍 뛰는 사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거라.
2012.09.23 수능을 앞둔 하람이에게 아빠가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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