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사들의 일곱 가지 죄 >.....존 테일러 게토(John Taylar Gatto)
미국 뉴욕주 맨해튼의 몇 군데 공립학교에서 26년동안 교사 생활을 하면서 여러차례 모범 교사상을 받았으며, 퇴직한 뒤로는 올바니 자유학교에서 자신의 독특한 게릴라식 수업방법을 실천하고 있다. 또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국가 교육제도의 근본개혁을 촉구하는 활동도 함께 하고 있다. 이 글은 1991년 뉴욕주 '올해의 교사'로 지명된 기념행사때 했던 연설로 푸른나무가 펴낸 <바보만들기>에 나온 내용이다.
26년 전, 제가 교사 노릇을 직업으로 골라잡았던 것은 그보다 썩 좋은 다른 일거리를 떠올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르친다는 일은 지역에 따라 다른 내용을 가지고 있지만 어느 곳에서나 두루 가르치는 일곱가지 교과 내용이 있습니다. 그 내용 뭔지 좀 아시는 게 좋겠죠. 물론 여러분이 이 내용들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볼 것인지는 여러분 마음대로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 비꼬는 뜻에서가 아니라는 사실만은 믿어 주십시오. 이 내용들이 바로 제가 가르치는 것이며, 그 보수를 여러분이 저에게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혼란
제가 맨 먼저 가르치는 것은 '혼란'입니다. 제가 가르치는 모든 것은 제멋대로에요. 모든 것들의 연관성을 파괴하도록 가르칩니다. 제가 가르치는 것 - 행성의 궤도, 상수법칙, 노예제도, 형용사, 건축제도법, 무용, 체육, 합창, 회의 방법, 소방 훈련, 컴퓨터 언어, 표준화된 시험.. 이들 가운데 무엇이 서로 연관성을 갖고 있단 말입니까?
사실과 이론들을 누비이불처럼 뒤얽어 놓는 학교 제도의 관행과 집착은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의 오랜 노력의 역사를 감춰놓고 있습니다. 자연의 순리 (어린 아이가 걷기나 말하기를 배우는 과정, 해뜨기에서 해지기까지 빛의 변화 등)는 모든 부분이 다른 부분들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하나하나의 행위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고 과거와 미래를 모두 비춰 보여 줍니다. 학교의 원리는 이렇지 못합니다. 한 교실 안에서도 그렇지 못하고 하루의 일과표 속에서도 그렇지 못합니다. 학교의 원리는 미치광이 원리입니다. 어느 한 부분도 확고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세밀히 살펴보면 허점 없는 것이 없습니다. 학교나 교사의 독단을 비판할 수 있는 수단을 감히 가르치려는 교사는 거의 없습니다. 모든 것이 그대로 받아들여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은 교과목을 배웁니다. 하지만 그게 정말 배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 카톨릭 신자들이 교리 문답을 배우듯 그렇게 받아들일 따름입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모든 일과 모든 것들 사이의 연관성을 해체하도록 가르칩니다. 체계화의 정반대 방향으로 끝없이 세계를 조각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텔레비전 프로 편성에 가까운 일이지, 질서를 심고 키우는 일이 아닙니다.
2. 교실에 갇히기
두 번째로 제가 가르치는 것은 학생들이 교실에 갇혀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학생들에게는 번호가 매겨져 있어서 교실을 벗어나더라도 제 자리에 쉽게 되돌려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번호에 매 여있는 어린이들이 함께 갇혀 있는 상태를 좋아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좋아할 만큼은 아니더라도 별 말썽없이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 능률적인 제도가 잘 돌아가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서로를 견제해 가며 행진의 보조를 잘 맞추게 됩니다. 대부분의 학교처럼 짜고 벌이는 경쟁판에서 정말로 가르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저마다 자기 위치를 알고 받아들이게 하는 거지요.
학생들의 99%를 교실 안에 묶어 두는 것이 교실 체제의 전체 구도이지만 저는 아이들이 시험 성적을 올리도록 공공연히 격려하기도 합니다. 잘 하기만 하면 더 우월한 반으로 올라갈 수도 있다는 미끼를 던져 가면서.
3. 무관심
세 번째로 제가 가르치는 것은 무관심입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어떤 것에 대해서도 지나친 관심을 가지지 않도록 가르칩니다. 어떻게 하느냐 하면 제 강의에 완전히 몰두하도록 하는 거지요. 자리에 똑바로 앉아서 온 마음을 기울여 경청하게 하고 제 눈에 들기 위해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도록 시키는 겁니다. 하지만 종이 땡 울리기만 하면 지금까지 하던 일이 무엇이든 곧바로 손을 떼도록 요구합니다. 다음 시간에 할 일로 서둘러 넘어가기 위해서죠.
진정 종소리가 가르치는 것이란 어떤 일도 끝낼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에 지나치게 몰입할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여러 해 동안 종소리에 길들여지고 나서도 중요한 일거리가 아무것도 없는 그런 세상에 맞춰지지 않는 학생이 있다면 그 학생은 성격이 웬만큼 강한 사람이 아닐 겁니다. 학교 시간을 지배하는 감춰진 원리가 바로 종소리입니다. 그 원리는 가차없는 원리입니다. 이 원리는 같은 길이의 어떤 시간이든 서로 똑같은 것으로 만들어버립니다. 마치 지도의 추상화 원리가 서로 다른 산과 강들을 똑같은 것으로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종소리는 학생들의 모든 노력을 무관심이 지배하도록 감염시키는 힘을 가졌습니다.
4. 정서적 의존성
네 번째로 제가 가르치는 것은 정서적 의존성입니다. 미소와 찌푸림, 상과 벌, 표창 따위로 저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버리고 미리 목표가 정해진 지휘 체계에 따르도록 가르칩니다. 모든 권리는 권위를 가진 사람이 주기도 하고 박탈하기도 하는 것이며 여기에는 이의를 제기할 틈이 없습니다. 권위를 가진 사람이 인정해 주지 않는 한, 학교 안에는 어떤 권리도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사로서 여러 가지 개인 결정에 간섭하는 일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합당한 일에는 허가해 주기도 하고 제 통제력을 위협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교정 조치를 하기도 합니다. 어린이들이나 십대 학생들에게는 끊임없이 개성을 드러내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신속 정확하게 판단을 내려야만 합니다. 개성이란 학급 이론에 저촉되는 요인이며 모든 분류 체계에 암 같은 존재라 할 것입니다.
이따금은 제 관할을 벗어나는 일로 아이들이 분노하거나 실망하거나 기뻐할 때 아이들의 자유 의지가 제 앞에서 마구 터져나오기도 합니다. 이런 일에 대해서는 교사가 아이들의 권리를 판별해 줄 수 없습니다. 오직 주었다 빼앗았다 할 수 있는 특혜를 빌미로 올바른 처신을 강요할 뿐입니다.
5. 지적 의존성
다섯 번째로 제가 가르치는 것은 지적 의존성입니다. 생물의 진화가 하나의 이론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가르치라는 지시를 받으면 저는 그대로 가르칩니다. 아이들이 이렇게 생각하도록 가르치라고 제가 지시받은 내용을 거부하는 아이들은 벌을 받습니다. 아이들이 생각할 내용을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이 있기 때문에 잘 하는 학생들과 못 하는 학생들을 구분하는 일도 아주 쉽게 됩니다. 잘 하는 학생들이란 제가 시키는 방향을 별 저항없이 잘 따르는 학생들입니다. 공부할 가치가 있는 수없이 많은 것들 가운데 우리가 가진 시간으로 무엇무엇을 공부할지를 제가 결정해 줍니다. 아니, 얼굴이 감춰진 제 고용주들이 결정해 줍니다. 그 사람들이 칼자루를 쥐고 있는데 제가 뭐하러 왈가왈부하고 나섭니까? 못 하는 학생들이란 물론 여기에 저항하는 학생들이죠. 자기들이 저항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이해할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자기네가 무엇을 언제 공부할지 스스로 결정을 내리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런 녀석들을 그대로 놓아두고 어떻게 저희가 선생 노릇을 해먹을 수 있겠습니까?
착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뭘 어떻게 할지 전문가들의 지시를 받으려 합니다. 이 가르침의 토대위에 우리 경제 체제 전체가 자리잡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의존성을 갖도록 훈련받지 않는다면 무슨 꼴이 벌어질지 상상해 보십시오. 사람들이 제멋대로 노는 방법을 다시 익히면서 텔레비전을 비롯한 상업 오락과 흥행들은 말라죽어버리겠죠. 사람들이 음식을 만들기 위해 채소를 심고 거두고 요리하는 일을 스스로 하게 되면 식당과 패스트후드점 같은 전문 음식 사업이 크게 위축되겠죠. 근대 법학과 의학, 공학의 많은 부분도 사라져버릴 겁니다. 의류 산업과 학교 산업도 마찬가지고요. 이 모두가 해마다 학교에서 쏟아져 나오는 의존성을 가진 사람들 덕분에 존재하고 번창할 수 있는 겁니다.
6. 조건부 자신감
여섯 번째로 제가 가르치는 것은 조건부 자신감입니다. 우리 세계는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들이 너무 많으면 버텨낼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저는 아이들의 자신감이 전문가의 의견에 얽매여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은 끊임없이 평가와 판별을 받습니다.
달마다 번듯한 모습으로 모든 학생들의 가정을 찾아가는 통지표는 부모들에게 자기 아이에 대해 얼마만큼 만족을 느끼고 불만을 느껴야 할지 퍼센트 단위까지 정확하게 알려 줍니다.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 통지표들이 쌓이고 쌓인 무게 아래 아이들은 성의없는 누군가의 판단에 따라 자기에 대해, 또 자기 미래에 대해 결정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시험과 성적, 통지표의 가르침이란 아이들이 자기 자신이나 부모를 믿기보다는 자격증을 가진 권위자들의 평가에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치가 어떤 것인지도 남이 가르쳐 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7. 숨을 곳은 없다
일곱 번째로 제가 가르치는 것은 숨을 곳은 아무 데도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너희들은 늘 감시받고 있다, 나와 내 동료들이 끊임없이 너희들 행동 하나하나를 살피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아이들은 자기만의 공간도, 자기만의 시간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학생들 서로간에 일러바치는 일, 심지어는 자기 부모의 일을 일러바치는 것까지 장려됩니다. 물론 저는 부모들에게도 자기 아이들의 문제점을 보고하도록 권유합니다. 집안에서 서로 고자질 하도록 훈련된 사람들은 사회에 대해서도 위험한 비밀을 간직할 위험이 별로 없겠죠.
끊임없는 감시와 개인 영역의 박탈은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으며 혼자 있는 것은 옳지 않다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줍니다. 감시란 유서깊은 제도로서 영향력 있는 여러 사상가들이 신보해 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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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교육의 일곱 가지 내용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보십시오. 모든 것은 언제까지고 예속된 계급을 위한 가장 중요한 가르침들입니다.
제가 가르치는 것과 같은 내용들을 날이면 날마다 학생들에게 가르치고도 국가의 위기를 맞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젊은이들은 어른들의 세계나 미래에 대해서 관심을 잃고 있습니다. 가지가지 오락과 폭력 말고는 관심을 갖는 대상이 거의 없습니다. 또 어떤 일에든 오래동안 집중할 능력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혼자 있는 것을 싫어하고 잔인합니다. 물질주의적이고 의존적이며 수동적입니다. 난폭하면서도 예상치 못한 일 앞에서는 겁쟁이며, 의미없는 일에 몰두합니다.
어릴 적의 갖가지 버릇들은 학교 교육을 통해 조장되고 확대되어 추악한 모습으로 자라납니다. 학교는 감춰진 교과 과정으로 올바른 인간성의 성장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공포심과 이기심, 미숙함을 이용하지 않고는 우리의 학교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자, 이제 제도가 된 학교 교육이 어린이들에게 얼마나 파괴적인 영향을 끼치는지 바로 보도록 합시다. 일곱 가지 내용의 교과 과정, 그 해독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가르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방법론은 근본적으로 지독하게 반교육적인 것입니다. 서투른 땜질로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 문화 위에 덮쳐오고 있는 미래는 우리 모두에게 비물질적인 경험의 지혜를 익히도록 강요할 것입니다. 그 미래는 우리에게 생존을 위한 대가로서 물질의 사용을 극소화하는 자연의 길을 따라 살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지금 이대로의 학교에서는 그런 공부가 가르쳐질 수가 없습니다. 12년 징역과도 같은 학교 제도, 거기서 진정으로 가르쳐 주는 것은 나쁜 생활 태도뿐입니다. 학교 선생 노릇을 잘했다고 상을 타 먹는 제가 드리는 말씀입니다. 제 말을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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