牛步萬里-나의 삶

가을 운동회

nongbu84 2013. 8. 23. 15:09

가을 운동회   1

 

 

초등학교 운동장 가득 단풍잎 같은

만국기가 바람의 뺨을 철썩 철썩 갈겼다.

바람은 모래 한 움큼을 집어 던지며 

구경나온 사람들의 멱살을 잡아챘다.

 

할아버지는 안경너머로 유년시절의 고향을 찾으며

어린 시절의 달리기와

거슬러 오르던 젊은 날의 장애물경기와

울컥 치밀어 오르는 중년의 한 세월을 생각했다.

 

젊은 사람들은 청군과  백군의 이어달리기를 구경하면서

까치발을 딛고 온 생애를 열개의 발가락위에 세웠다.

발에 힘을 줄수록 젊은 날의 추억이 찾아왔다.

 

늦깎이 아저씨들은 막걸리 한 사발에 취해 흔들리며

흐린 하늘 퀭한 눈동자로 첫사랑을 찾았다.

옷깃을 스쳤던 첫사랑의 여자가

아이의 손을 꼬옥 잡고 지나갔다.

그 잡은 손에 아쉬움만 움켜쥔 채 종종 걸음으로 스쳐지나갔다.

흙먼지가 눈을 파고들었다.

 

 

아이들은 달렸다.

한 생애를 다른 생애로 바톤 하나로 이어주며

달리고 또 달렸다.

그들은 만국기가

먼 이국의 땅에서

바람처럼 찾아오는 연분홍빛 소문과

먼 이국으로 떠난

친구의 편지를 주고 가는 것이란 알지 못했다.

 

출발선을 떠나 운동장을 달리면

제자리로 다시 돌아온다는 사실을

모른 채 앞으로만 달렸다.

한 생애가 또 다른 생애로 이어지다가

또 다른 생애로 이어지다가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달리기가 출발하는 것이라 여기며

온 몸이 뻐근하도록 힘주어 출발선에 서지만  

그 출발이 곧 떠남이 아니라

되돌아오기 위함임을 알지 못했다.

그들이 달려가는 이유가

한 마디의 추억을 다른 사람에게

이어주는 일임을 알지 못했다.

 

제법 운동회 맛이 나는 건

에둘러 응원하는 사람들의 뒤에서

까치발을 들어도

펄쩍펄쩍 뛰어 올라도

결코 볼 수 없는 아이들의 달리기를

마음으로 보는 일이다.

 

제법 운동회 맛이 나는 것은

그 응원의 대열에서 돌아와

이제는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에서

지나간 유년시절의 꿈과

고 꼬집는 맛이 무척 매서웠던 계집아이의 손맛을

웃음으로 추억하는 일다.

제법 운동회 맛이 나는 것은

이 세상 어딘가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들의 풍경으로 살아가는 일이다.

 

 

가을 운동회 2

 

가을 운동회 날,

만국기가 바람의 뺨을 철썩철썩 갈기고

가을햇살은 노루오줌처럼 찔끔거리고

흙먼지가 건조한 안구에

파고들어 아렸다.

서둘러 모래먼지 들어갔다고

아들녀석에게 눈물을 변명하는 일이

자주 반복되는 걸 보면

까치발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가을 운동회가 멀어진 탓이리라.

이제는 멀리 멀리 날려 보낸 어린 시절의 연처럼

만국기가 높이높이 하늘로 치솟기 위해서는

줄을 끊어야 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고 계집애,

꼬집는 손맛이 매서웠던 고 계집애만

고 계집애의 손맛만 모르고 지냈다면

가을 운동회 만국기가 펄럭이며

바람을 뺨을 때리는 이치를 내 어찌 알았을까.

 

아들아,

달려 네 생애를 다른 사람의 생애로 이어주는 달리기에

참여하지 못했다고 엉엉 엉덩이 주저앉아 울었지만........

괜찮단다.

네가 크면서 계집애의 매운 손맛을 한번만 느껴본다면

너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이쁘게 보이고

모든 사람들의 아픔이 먼저 보일 거란다.

그렇게 되면

너는 이어달리기 학급대표로 운동장을 달려

만국기에 그려진 나라 나라마다

사람을 찾아 사람을 떠나고

사람을 떠나 사람을 만날 것이란다.

"허허, 고놈 잘 달리네,

엄마 회초리 피해 도망갔던 솜씨야."

 

아들아,

네가 크면서 피멍든 단풍잎을 뜯어

책갈피에 꽂아 사랑을 고백할 수만 있다면

앙칼진 구석에 쪼그려 앉아

햇살에 눈물이 말라 뺨에 달라붙는 추억을 안고

병아리처럼 꼬박꼬박 졸다가

잠에 빠져드는 평화로운 세상으로 달려갈 수 있단다.

 

그러면 너는

"허허, 고놈 친구와 함께 서로의 아픔을 가을 햇살에 말리다가

저녁이 되면 노을 속으로 함께 걸어가는 동행이 되것네"

소리 없이 응원의 대열 뒷 켠에 앉아

응원하는 할아버지를 만날 것이다.

 

 

운동회가 끝나면 사람들은 파란 하늘 펄럭이는 만국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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