閼雲曲 -시

편지 쓰는 감나무

nongbu84 2017. 10. 27. 09:38

 

편지 쓰는 감나무

 

누이야, 가을이다

삶은 계란 한판처럼 저렴하지만

애잔하고 함부로 기특하여서

뒤뜰 은행잎은 노랗게 물드는 것이다

막다른 길의 파란 대문 앞에서

감나무는 연등 같은 홍시 몇 개 달고

분홍 편지를 쓰는 것이다

 

누이야, 가을 아침이다

들판 한 가운데 빈 집만 남겨 놓고 어딜 간 건가

대문 앞에 서서 불러보지만 아무 대답이 없네

누이의 베게에서 아직 분 냄새 그득한데

간단 말도 없이 어찌 그리 무심히 간단 말인가

미루고 미루어 차마 하지 못한 말은

장독대 빈 항아리에 가득 넣어 두었는데

누이는 아직도 아무것도 모르더만

뒤란 대숲이 그리 울어도 영영 모르고

감잎 몇 장 떨어지는 줄 만 알더만

붉게 물든 홍시 가득 담아두었는데

누이는 암것도 모르고 그냥 떠났더만

 

누이야, 허수아비도 쓸쓸하다

삶은 서리 내린 아침이어도

팽팽하게 물드는 것이어서

나는 미처 다하지 못한 말을

붉은 가슴에 주렁주렁 매달고

가을 내내 대문 앞에 서서

당신에게 쓴 수줍은 편지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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