閼雲曲 -시

고앙이

nongbu84 2017. 11. 10. 10:54

 

고양이

 

1


어린 시절, 햇볕 사냥을 즐기던 고양이 한 마리 키웠지요

누런 바탕에 흰 줄무늬 털이 곱고 윤기가 자르르 흘렀지요

 

하루는 비린내 나는 햇살 물어와 장독대에 가득 펼쳐 놓고 비늘 뜯다가

뒤란 처마 그늘과 장독대에 널은 햇살의 경계를 따라 종종종종 걸어다녔지요

그래도 지루하면 그늘에서 햇살로, 햇살에서 그늘로 껑충껑충 건너뛰며 놀았지요

아슬아슬하고 부드러운 곡예가 끝나면

 

고 녀석 장독대에서 햇볕 쬐며 앞발을 턱에 괴고 졸았지요

봄날 아지랑이에 홀린 듯 두 눈 마냥 아득한 깊이로 빠져들어

눈동자로 무한한 적막이 스며들고 눈꺼풀엔 고요가 달라 붙었지요

나른하게 몸 풀려 빠져든 곤한 잠,

 

아마 봄날 오후의 낮잠만큼 개운한 게 세상에 또 있을까요

자고 나면 귀가 쫑긋 서고 수염에선 생기가 어쩜 그리 발랄하게 돋아 빛났는지요

그 상쾌한 기분 또 어땠겠어요

 

2


어머니 고개 넘어 시장가면

뒤란 장독대에 쪼그리고 앉아

나는 햇볕 쬐며 졸았지

땅바닥에 낙서 하다가

조청 한 숟가락 퍼먹은 속이 달쳐

 

눈꺼풀에 붙은 졸음 이내 달아나고

나는 몸 단 꿀단지가 되었지

항아리 열어 간장 끓은 냄새 맡아도

왕 눈깔사탕 생각해도

시집간 누이의 분내는 코끝 맴돌아

 

나는 고양이처럼 몸을 웅숭그려

콧등에 올라앉으려는 벌 쫓듯

연신 손부채질 하다 보면

 

하루해 다 가고 장보따리 머리 인

울 엄니 산자락 돌아오고 있었지

저만치서 떠오르는 초생 달처럼,


3


오래된 공터 고양이 한 마리

웅크리고 앉아 있네

 

미끄럼틀 빈 구멍 노려보면서

앞발을 모아 바짝 엎드려

틈을 응시하는 저 집요한 눈빛,

 

저 집을 떠나온 자의 시선이 닿은

최후의 지점은 어디일까

제 안일까 아니면, 밖일까

 

저 눈빛에 숨은 저의(底意)는 무엇일까

허기진 욕망의 간절함인지 아니면,

고뇌하는 구도자의 진지함인지

알 수 없지만

 

고양이 한 마리 가장 낮은 땅에

바짝 엎드린 기다림의 습성은

아주 오래된 전통 의식이어서

모든 골목의 집들은 고양이처럼

산비탈에 따개비처럼 달라붙어

떠난 사랑 오랜 세월 기다리네

 

- 네 소식 궁금하다, 연락 기다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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