閼雲曲 -시

손두부

nongbu84 2017. 12. 14. 11:07

 

손두부

 

영수증 챙기듯 삶을 차곡차곡 쌓아놓지 않아도 괜찮은 날에 눈이라도 오면

귓불이 얼얼할 정도로 추운 날이어도 검은 머리에 흰 눈 쌓여도 털어내지 않고

아주 오랫동안 자전거 타고 편지를 배달한 늙은 우체부에게 길을 물어

그리운 쪽으로만 난 길 따라 준 쪽으로만 뻗은 가지 흰 뼈다귀로 남아

그리운 이들이 보름달 휘영청 걸어놓은 서해 바닷가 월훈리 솔숲에 가려 하네

 

가다가 손수 만들어 파는 안골 손두부집에 들러 깻잎에 막 데친

두부 한 조각 싸서 청양고추와 양파 다져 만든 새콤하고 매콤한 간장 양념을 찍어

밋밋하더라도 텁텁한 탁주 한 사발 들이키며

벌겋게 닳아 오른 장작 난로에 두 손 쪼이려 하네

 

오랫동안 늙어가고 있는 주인 할머니 자시려던 동치미 국물에 국수 삶아 넣어 주며

양지뜸 텃밭 배추 속처럼 고소하고 아삭한 시절인연 암시렁토 않다고 연신 늘어놓으면

나는 잔가지 난로에 괜히 꺾어 넣으며 남은 국물까지 후회 없이 마저 마시겠네

 

저당 잡힌 삶을 혹여라도 되찾아 푸르고 찬 하늘 맑은 날에 눈이라도 내리면

어두워지는 저녁 함부로 애틋하고 서러워 제 몸 데운 손두부에

둥글고 흰 양파 같은 바다 휘둘러 불어오는 맵고 찬 바람 몇 숟가락 떠 넣고

괄괄하고 얼콰하게 끓어오르면 후후 불며 투가리 바닥 싹싹 비우고 나서

하얀 쌀밥 같은 눈송이 나리는 문 밖으로 나서

두부처럼 말랑한 보름달 물어뜯었다가 뜨겁게 데여 도려내듯 에인

솔숲의 마음 후후 식히며 뒷산의 잔등 토닥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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