閼雲曲 -시 318

그늘 감시원

그늘 감시원                                                                                 박 승 균     휘어진 가지 사이로 넓어지는 잎들   바람이 숲을 흔들면저 멀리에서 한 사람이 그늘 속으로 걸어온다   그는 원래 목공이 아니었다 그늘진 얼굴로 수심 깊은 나무를 지키는 산림 감시원   이제 부서진 벤치를,방부목 데크를 고치는 사람길게 뻗은 칡넝쿨을 걷어내며 길을 열어주는 사람한 팔을 고사목 어깨에 올려놓고아득한 시선을 보태며 가던 길 멈춘 사람 사라진 사람들을 호명하다 보면에돌아 들려오는 숲 속 메아리   바닥에서야 그림자를 볼 수 있어   그림자를 읽어야 그늘의 노래를 부를 수 있어   상처 난 문장들 하나 둘 다가와구멍 성성한..

閼雲曲 -시 2024.09.25

봄 안부

봄 안부                                                                    박  승 균   주소 불명의 이번 생애   당신이 기다리던 엽서는무사히 도착했는지요?   잎과 잎 사이를 교란하는 봄볕나무 사이를 관통하는 산새 울음등걸에 기대어 핀 제비꽃바람결에 퍼지는 연록의 향기 땅에 잇대어 펼쳐놓은 그늘 몇 장 은은하게 울리는 물관의 연주곡들잔잔하게 우듬지가 뱉어내는 숨결   모든 게 꼭꼭 눌러 쓴 무구한 하늘의 문장들 주소를 잃었지만다시 연두 색감으로 물드는 아침 숲

閼雲曲 -시 2024.09.24

골담초

골담초                                                          박 승 균   양지 바른 돌담 옆 가시 돋은 나무 한 그루   비와 이슬에도 젖지 않는 인연 몇 가지 뻗었다   햇볕을 긁어모으고달의 숨소리 다독이며   밤낮 가리지 않고무던한 정성 들였으니   외할머니 오늘도   또 노란 꽃 앞에 쪼그려 앉아너풀대는 나비 이야기 듣고 있다   활짝 핀 귓등에봄 햇살 환하다

閼雲曲 -시 2024.09.20

물 위에 새긴 오후

물 위에 새긴 오후                                                                           박 승 균  이끼 낀 수면을 걷어 내고 맑은 호수 위에 당신을 조각하였다   눈과 귀를 새기는데 자주 침 삼키던 소리와 울먹이던 목소리, 귓바퀴를 맴돌고   소문에 당신이 보낸 안부 몇 잎 수면에 내려앉았다   물결은 잔잔하게 파문을 노래하며 당신의 이름 은은하게 불렀다   헛헛한 소나기가 잠시 비껴갔으나 물 위 당신의 윤곽 지울 수가 없었다   호수에 애틋하게 새긴 오후를 손 집게로 들어 말리는 순간,    무심한 바람이 낚아채어 사라졌다   당신의 테두리가 물속으로 아련하게 저물어 갈 때 나는 늑골의 오래된 현들을 연주하였다   혼자 누워 있던 물푸레..

閼雲曲 -시 2024.09.13

봄의 처음

봄의 처음                                                                               박 승 균  위-이-잉, 벌 떼가 수런거리던 거기, 나무가 몸살 앓는 소리를 듣다가 깜박 졸았는데,  하얀 블라우스에 분홍 주름치마 입고 다가오는 선생님, 내 눈을 바라보던 봄의 눈빛, 나는 연두 잎처럼 녹록지 않게 짙어가고  감춘 것 들키기라도 한 듯 어쩔 줄 몰라 눈길 줄 곳 찾는 데, 보는 곳마다 헤실헤실 벚꽃이며 살구꽃이며 노란 산수 유까지 피어나고  손에 쥐었던 꽃목걸이 짓물러 손바닥에 꽃물 흥건했다 햇볕같이 따뜻한 눈물이 그만 뚝, 두 눈을 눌러 닦아주던 결 고운 손가락  아득해지는 자리, 감꽃 수북하게 떨어진 돌무덤에 앉아 내 배꼽 영그는 소리..

閼雲曲 -시 2024.09.12

뒤에서 가만히

뒤에서 가만히박 승 균   뒷모습에도 저마다의 표정이 있어요 양쪽 어깨는 이미 이력이 나서 뭉개진 계절의 끈이 박혀 있어요 오늘 길에서 당신의 뒤를 따르면서 휘청이던 한 집안의 가계도를 읽고 있 어요 떠도는 먼지가 햇빛을 받아 빛나지만 당신의 뒷모습 참, 공손하고 쓸쓸하지요 가난한 궁리를 따라 한쪽으로 기울어졌지요 날개 꺾인 사람의 무덤을 자주 덮어주었으니 이제 봉분처럼 불거져 나온 뼈가 척추를 따라 남은 생을 간절 하게 버티고 있네요 그러고 보면 뒷모습은 수많은 갈래의 그늘을 적어놓고 있지요 둑처럼 무너져 굽은 허리 차마 읽지 못하고 눈길 사뭇 미끄러지는 저녁, 힘없이 흘러내린 당신의 그림자가 와서 어둑어둑, 남은 표정을 쓰고 있네요

閼雲曲 -시 2024.09.11

길은 심부름 가서 오지 않았다

시인의 말                                                                   박 승 균   나는 세상을 재단하고 판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아프고 쓸쓸한 것을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으리라. 나의 이야기는 그에게서 몸을 얻었고그의 이야기는 내게서 마음을 얻었다. 모서리가 된 그는 대답이 없다. 짤막한 오후에 앉아 영원히 반복되어도 좋을 그리움으로내가 걸어가는 길의 첫 문장이 된 그를 기다렸다. 길에서 만난 냉온의 문장 몇 개를나를 참고 견뎌준 이 세상 모두에게 바친다.                                                                                                             ..

閼雲曲 -시 2024.09.10

먼지의 족장

먼지의 족장 과거를 백미러에 넣고 달려온 고향집, 방음 이중 유리창 사이에 갇혀 퍼덕거리던 어둠이 아직 질식하지 않았다 형광등을 켜자 네눈박이 나방 떼가 날개를 접지 않고 그대로 달려들었다 날개에 묻은 불빛이 하얗게 분말을 쏟아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래전의 뜰팡에 가지런히 놓인 아버지의 신발 한 켤레.....저녁의 찢어진 지느러미, 말라버린 노을의 검불, 부서진 별빛 가루, 안개 유령의 머리 비듬, 앉은뱅이 밤의 한숨 소리, 어깨 무너진 쑥대공의 비명 소리, 무너진 흙담의 황토 빛깔, 부엌의 고린내 나는 부레....빈 신발에 가득 쌓였다 여러 번 발목 접질린 나무가 뿌리를 뻗어 들썩였지만 신발은 꿈쩍도 않고 먼지를 가득 담았다 폐가의 신발은 먼지족의 공동 납골당, 신발 먼지를 털어내고 달빛 몇 줌을 넣..

閼雲曲 -시 2020.0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