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첫사랑 콘크리트 쳐 굳어가던 가슴에 네가 찍고 간 발자국 영영 새겨져 헛헛하고 쓸쓸한 날은 좀체 이불 개켜 장롱에 넣듯 그리움을 접어 넣을 수도 없었다 화투장 돌리듯 눈발까지 투덕투덕 내리면 부러진 벚나무가 가지 끝부터 젖어들어 큰 슬픔으로 지운 작은 슬픔까지 살아났다 버짐.. 閼雲曲 -시 2018.12.20
개기월식 개기 월식 .. 그 겨울 새벽 술집마저 모두 문을 닫은 새벽 골목은 어두웠다 보름달은 첨탑에 꿰어져 냉동실의 돼지 목살처럼 얼어 있다 철도 건널목, 차단기가 내려와 남녀의 앞을 막았다 라면봉지처럼 구겨진 어둠 속, 철길 옆, 고바우집이 검은 천막을 뒤집어 쓴 채 얼굴만 내밀고 있다 .. 閼雲曲 -시 2018.12.19
음각陰刻 - 사성암 약사 마애불 음각陰刻 - 사성암 약사 마애불 진창에 빠진 듯 삶이 미끈거리고 질퍽거려 갓 쪄낸 인정人情이 그리운 날, 저물어가는 저녁 산에 올라 깎아지른 절벽에 세월을 층층이 쌓아 세운 전각을 찾아 바위에 손톱으로 새긴 약사 마애불을 보고 있으면, 生고구마 깎아먹고 배앓이 할 때 배 문지르.. 閼雲曲 -시 2018.12.18
불장골 저수지 불장골 저수지 대나무 빗자루 잡은 듯 차갑고 쓸쓸한 날 불장골 저수지 방죽에 서서 얼음 내려앉은 수면을 바라보네 석양이 산등성이를 자주 넘지 못해 저수지 따라 에둘러 난, 산 밑 길 위에 하얀 이빨을 시리도록 드러낸 잔설 부러진 나뭇가지처럼 굽은 뼈를 드러내어 얼음 위에 박힌 .. 閼雲曲 -시 2018.12.17
지상의 방 한 칸 지상의 방 한 칸을 위하여 닳고 닳은 대나무 빗자루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 차가운 싸늘함이 손끝에 와 닿는다 영원히 이렇게 살 수는 없어 흑백의 영정으로 남은 젊은 청년, 뿌우옇게 번진 얼굴에 검은 근조 리본이 힘없이 드리워져 퉁퉁 불어터진 반달처럼 쓸쓸하다 가빠로 덮은 지.. 閼雲曲 -시 2018.12.12
역린逆鱗 역린逆鱗 산비탈을 거슬러 억세게 핀 하얀 꽃, 生의 길을 한꺼번에 다 걸을 수는 없어 잠시, 아침 한 때 잔돌밭에 앉아 바람의 톱날에 긁힌 허벅지를 식히고 있다 흰 머리칼 찬바람에 흩날리며 목울대까지 치켜세운 깃 정갈하게 여미고 목은 산 너머 먼 바다를 향해 빼어들었다 떠난 사람 .. 閼雲曲 -시 2018.12.06
동치미 국물 동치미 국물 정조준하고 힘주어 오줌을 싸는데 누가 내 엉덩이를 걷어 찬다 움찔, 놀라 뒤를 보니 한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황당무계荒唐無稽하여 멈칫, 녀석은 친구인줄 알고 장난치려다가 그만 한 생애의 마른 엉덩이를 걷어찼으니 서로 얼어붙은 듯 한참을 동작 멈춤, 앞만 집중.. 閼雲曲 -시 2018.12.05
바로 지금 이 순간 서시 - 바로 지금 이 순간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사람이 나의 사랑이어라 내가 직접 피해를 당하지 않았어도 나서야 할 슬픔이 있다는 것, 친구여, 이렇게 누워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밤중에 찾아온 반가운 손님처럼 흰 눈은 내리는데, 흰 눈은 쌓여 모든 길을 덮었는데, 너는 연락도 없.. 閼雲曲 -시 2018.12.03
바로 여기 이곳에서 바로 여기 이곳에서 붉은 목련 꽃잎이 시들어 떨어졌다 철책을 지탱하느라 매어놓은 철사가 버드나무 몸속을 파고들었다 달빛이 후박나무에 목매달아 죽었지만 사람들은 늦은 시간까지 이어폰을 꽂고 운동장을 열심히 돌았다 바로 여기 이곳에서 입학식에서 아이가 뺨을 맞았다 쇄골에.. 閼雲曲 -시 2018.12.03
그해 겨울 새벽 그해 겨울 새벽 눈발이 쌓여 모든 길이 막혔다 역驛광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 대의 차도 다니지 않았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마지막 기차를 타고 눈 속으로 사라진 사람, 네가 내게로 오던 길도 네가 내게서 가던 길도 모두 막혀 대문을 걸어 잠갔다 내가 네게 가던 기억도 네가 내게 오.. 閼雲曲 -시 2018.11.29